보고서 작성해서 오세요

네 그럼 내용을 좀 보세요

by 윤아부지

직장 생활을 다룬 TV 드라마를 보면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단정히 입은 직장인들이 결재판에 고이 모신 보고서를 들고 상사에게 보고하러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그 뒷 장면이 보고서 종이들이 날아다니는 장면인 것은 함정이다.


드라마: 미생


왠지 모르게 충성스러운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신입 시절, 타 부서와의 업무 조율 과정에서 문제점이 하나 발생했고, 일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담당자 선에서 주고받던 이메일들이 서로의 팀장을 cc로, 나아가 부서장, 담당 임원까지 넣어가며 기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cc: Carbon Copy, 참조)


이윽고 팀장님이 불렀다.


보고서 작성해서 오세요


직장 생활의 첫 보고서다.


대학 시절 리포트 꽤나 써본 나에게 있어서 보고서 뭐 별 것 있나 싶었다. 보고서 = Report 아니겠는가.


정성 들여 3장짜리 보고서를 작성해서 팀장에게 갔다. 나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슈를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몇 달간 묵은 이슈를 3장에 정리하다니! 스스로 칭찬할만했다.


보고서를 받아 든 팀장은 거의 던지기 직전의 표정까지 갔다가 억지로 흥분을 가라 앉히며 보고서 작성법을 알려주겠다 했다.

(실제 과, 차장급들의 보고서가 공중 부양하는 장면을 종종 목격한 나로서는 고맙다고 해야 할까.)




우리 팀의 꼰대들을 위한 보고서는 대략 아래와 같은 순서로 ‘디벨롭’된다.


1. 첫 번째 라운드는 무조건 ‘와꾸’다.

보고서 틀을 잡는 단계다.

주의할 점은 무조건 한 장 안에 모든 내용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욱여넣어야 한다.

문제점 현황, 발생 개요, 진행 방향을 포함하여 1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틀을 잡는다.


2. 틀이 어느 정도 잡혔으니 내용을 디벨롭한다.

우리의 잘못을 잘 덮고 상대의 잘못을 부각할 수 있으면 좋다.

한 장에 넣다 보니 내용 누락이 많다. 유첨 혹은 별첨이란 이름의 첨부물을 정리하고 내용을 요약한다.

첨부물은 모두 출력하여 중요 부분에 형광펜으로 마크업을 한다.


3. 최종단계는 보고서의 고급화 단계다.

내용 중 단어들을 웬만큼 잘 쓰이지 않는 고급 단어들로 바꾼다. 영어도 좋고 한자어도 좋다.

한자어가 많이 들어간 단어일수록 있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실제 한자어를 사용하면 문장이 압축되는 효과가 있어 한 장에 요약하기 좋은 전략이다.

1안, 2안과 같은 단어에는 한자어 案을 사용한다. 한자가 중간중간 섞여 있으면 고급져 보이는 효과가 있다.


최소 3단계를 거치고 나면 드디어 한 장 짜리 보고서가 작성이 완료된다. 첨부물이 10장씩, 그 이상씩 되는 것은 안 비밀이다.


이렇게 완성된 한 장 짜리 보고서를 결재판에 고이 모셔서 부서장에게 간다.


검토 또한 역시 시작점은 와꾸다. 자를 들고 앞글자의 정렬이 잘 이루어졌는지를 먼저 체크를 한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빨간 펜을 꺼내 들고, 오탈자와 띄어쓰기 검토를 시작한다. 요즘 워드나 한글 등의 프로그램은 그 자체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자동 검토해 주지만 꼰대들은 믿지 못한다. 스스로의 한글 실력을 믿으며 이를 친절히 검토해 준다. 보통 꼰대의 검토가 틀렸더라도 틀린 대로 고쳐서 가져다준다.


내용 검토는 제일 마지막에 이루어진다. 한 장에 내용을 담다 보니 부연설명을 드려야 하고, 보통 이 단계에서 보고서들이 공중부양을 하는 마법을 보게 된다. 분명 미리 구두로 보고를 드리고 이메일의 참조로 넣어 충분한 내용 공유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처음 듣고 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럴 거면 왜 본인을 이메일 참조에 넣지 않냐고 호통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지금 내게 있어서 보고서는 사실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10년이 넘게 꼰대들 밑에서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보인다고나 할까. 이 문제는 반드시 보고서를 써서 오라고 할 것이다 정도의 감이 생겼다.


10년간 수 십장의 한 장 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낸 나다. 보고서 하나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예전의 유사한 보고서 하나 꺼내서 내용 조금 수정하고, 일명 와꾸만 잡아서 팀장에게 던진다. 그럼 내 할 일은 끝이다.


한두 시간이 지나면 팀장이 부른다. 빨갛게 물들어진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 돌아와서, 팀장의 코멘트를 반영한다. 보기 좋게 문단을 나눈다. 별 것 없다. 정말 코멘트만 반영한다.


너무 빨리 가져가면 내 생각은 넣지 않고 코멘트만 반영한 것처럼 보일까 봐 일부로 시간만 조금 끈다. 그러고는 한두 시간 후 다시 출력을 해서 팀장에게 넘긴다. 그러면 본인이 쓴 내용인데 열심히 다시 뜯어고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나의 보고서는 디벨롭되어 간다.


출처: 페이스북 약치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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