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충과 혐충 사이: 러브버그가 던지는 언어의 질문
붉은등우단털파리, 그 딱딱한 학명과는 달리 '러브버그'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이 작은 검은 곤충.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든 주인공입니다. 도심 곳곳에 떼 지어 출몰하며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곤충 전문가와 환경 기관, 일부 지자체는 한결같이 이들을 익충(益蟲)이라 불렀죠. 땅속 유기물을 분해하고 꽃가루를 옮겨 식물의 번성에 기여한다는, 지극히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전문적인 언어'는 이 작은 생명체가 가진 모든 의미를 온전히 담아낸 것일까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들이 빚어낸 언어의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누군가 '새옹지마'를 읊조려도, 당장 눈앞의 불행에 발목 잡히는 우리네 삶처럼, 언어의 권력이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일상 속 경험은 전문가들의 정의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도심의 빌딩 숲과 자연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이 곤충은 마치 검은 폭설처럼 자동차 앞유리를 뒤덮어 시야를 가리고, 아파트 외벽을 시커멓게 물들이며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여름밤 창문을 활짝 열고 시원한 바람을 쐴 생각은 엄두도 못 내게 만들었고, 거실 벽에 빼곡히 붙어있는 러브버그 떼는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을 유발했습니다.
운전 중 시야를 가리고, 창문을 열기조차 꺼려지게 만드는 그 불편함과 불쾌감은 단순히 '익충'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짜증 나는 고통이었습니다. 불편함이란 어쩌면 가장 솔직한 감각이 아닐까요? 인간은 그 불편을 해결하며 삶을 개선해 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익충'이라는 가면은 러브버그의 성가신 현실을 교묘하게 감추는 기만적인 장막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감각이 느끼는 진실을 외면하고, 심지어 그 불편마저도 감내하라고 종용하는 듯한 압력으로 다가왔습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우리의 인식을 규정하고, 나아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전문가들이 러브버그를 익충이라 명명한 순간, 우리 마음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았던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익충이니까 괜찮아', '자연에 도움이 되는 거니까 참아야 해'라는 무의식적인 암시가 깔린 것이죠. 이는 개인의 감각적 경험보다 공인된 언어적 정의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상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특정 프레임에 갇혀버린 언어가 개인의 주관적이고 생생한 감각을 억누르는 순간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러브버그가 주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마땅히 행해야 할 방제에는 소홀히 대처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언어적 정의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장벽이 현실을 직시해야 할 우리의 눈을 가리고, 문제 해결의 기회를 앗아간 셈입니다. 우리가 흔히 '진실'이라 믿는 것들이 사실은 언어라는 틀 안에서만 유효한 것일 수도 있다는 씁쓸한 깨달음이 드는 지점입니다.
이제, 새로운 언어의 창조가 절실합니다. 러브버그를 '익충'이 아닌, 차라리 '혐충(嫌蟲)'이라 부르는 것은 어떨까요? 혐충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불편과 불쾌감, 그리고 번거로움을 유발하는 곤충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표현을 넘어섭니다. 이 새로운 언어는 인간과 자연, 도시와 생태계의 복잡 미묘한 경계를 더욱 선명하게 그어줄 것입니다. 무작정 '익충'으로 분류하여 불편을 감내하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무차별적으로 '해충'으로 규정하여 제거 대상으로 삼는 것도 아닌, 중용의 미학이 담긴 이름인 셈입니다.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일상의 작은 불편마저도 언어로 포착하려는 섬세한 시도인 것입니다.
혐충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불쾌감을 표출하는 것을 넘어, 러브버그의 존재를 보다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거부감이나 무조건적인 찬양이라는 양 극단을 벗어나, 이 작은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러브버그의 번식을 억제하는 친환경적인 방법을 고민하거나, 도심으로의 유입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 실질적인 해결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결국, 언어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자연과 인간이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게 됩니다.
이는 곧 인간이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되, 자신의 감각과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러브버그를 혐충이라 재정의하는 작은 언어의 변화가 우리의 인식을 뒤바꾸고, 일상의 불편을 덜어내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이 작은 단어 하나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쩌면 이 '혐충'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러브버그와의 새로운 공존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가 현실을 창조하는 작은 마법이자, 우리 삶의 불편을 해결하는 지혜로운 시작점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