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론토의 겨울밤, 사람의 온도가 그리움을 덥히다

12월 20일 (토) | 인천공항 출발, 토론토 송상근 형님 댁

by papamoon

공항에는 늘 묘한 공기가 흐릅니다. 떠나는 자들의 설렘과 남겨지는 자들의 아쉬움이 뒤섞인 그곳.

오전 10시 5분, 인천을 출발하는 KE077 편의 육중한 기체가 활주로를 박차고 오르는 순간, 비로소 실감합니다. "아, 나는 이제 어깨를 짓누르던 ‘직장인’이라는 이름표를 잠시 내려놓고,

낯선 세상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홀가분한 ‘여행자’가 되는구나."

토론토행 KE077 ©문현호

13시간이 넘는 긴 비행. 홀로 떠나는 여행의 고즈넉함 때문인지 생각이 깊어집니다.

창밖의 캄캄한 하늘을 스크린 삼아, 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먼저 시작합니다.

시계바늘은 2003년, 제가 처음 사회라는 정글에 발을 디뎠던

그 서툴고 어리숙했던 신입사원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때 제 앞에는 태산처럼 커 보이던 선배님이 한 분이 계셨습니다. '송상근 차장님'

갓 입사해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던 제게 업무의 A부터 Z까지를 가르쳐 주셨던 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긴 세월 동안 그분을 부르는 제 호칭도 깍듯하고 어려웠던 ‘차장님’에서,

믿고 따를 수 있는 든든한 ‘팀장님’으로, 그리고 이제는 허물없는 ‘형님’으로 변해왔습니다.

호칭이 편해지는 속도만큼, 형님과 제 사이 마음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지만,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20년을 이어온 끈끈한 정(情)은 옅어지지 않았습니다.

토론토 피어슨 공항(YYZ)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으로 다시 아침 9시 30분.

입국 게이트 너머로 그리운 얼굴이 보입니다. 살은 좀 빠지셨을지언정,

20년 전 저를 향해 지어 보이시던 그 사람 좋은 미소는 그대로입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형님의 손을 맞잡으니 더욱 반갑고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형님의 차를 타고 댁으로 향하는 길.

사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여행의 시작이 아닌, 깊은 감사의 순례이기도 합니다.

제 딸 시은이가 이곳 토론토에서 홀로 유학 생활을 시작할 때,

아빠인 저는 한국 직장에 발이 묶여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기숙사 이사 문제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형님의 목소리는 천군만마와 같았습니다.

“야, 너한테는 내가 형님 아니냐. 형님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시은이 이사는 내가 책임질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선뜻 “내가 네 형님이니 당연히 돕겠다”며 나서 주신 그 감사하고 진심 어린 한마디에

꽉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조카뻘 시은이의 이삿짐을 날라 주시는 형님의 모습에서,

시은이는 부모의 부재를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낯선 땅에서 시은이가 지독한 향수병을 앓고 있을 때,

아이를 집으로 불러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신 분들도 형님 내외셨습니다.

형수님은 한국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와 정성스런 한식 밥상을 차려주셨다지요.

쭈뼛거리며 숟가락을 든 시은이에게 갓 지은 밥과 따뜻한 국을 내어주시며 이렇게 격려해 주셨다고 합니다.

“시은아, 여기 토론토에도 네 가족이 또 있다고 생각하렴.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 밥 생각날 때는 언제든 오너라. 우리가 곁에 있어 줄게.”

그날 시은이가 삼킨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타국에서 만난 ‘또 하나의 가족’이 건네는 든든한 울타리였을 겁니다.

그 응원 덕분에 아이는 무너지지 않고 씩씩하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형님 댁 거실에 앉아, 형님이 따라주시는 술 한 잔을 받습니다.

형수님이 차려주신 저녁상 ©문현호

시은이는 내일 윈저(Windsor) 역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어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마치 아이가 옆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훈훈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하여, 때가 되면 인연도 흩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 저는 확신합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소나무처럼, 평생을 이어가는 인연도 분명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상근 형님과 지영 형수님, 그리고 저. 우리가 직장 선후배로 만나

지구 반대편에서 이토록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건넨 진심이 세월이라는 담금질을 견뎌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창밖에는 캐나다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지만, 형님 댁은 온기로 가득합니다.

이 따뜻한 기운을 가득 안고, 내일은 기차를 타고 시은이를 만나러 갑니다.

윈저 역 플랫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딸아이를 꼭 안아주며 말해주고 싶습니다.

“시은아, 우리 참 복 많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좋은 분들이 우리 곁에 계시니 말이야.”

내일 만날 딸의 얼굴과, 지금 내 앞에 앉아 계신 형님의 미소가 겹쳐지며,

여행의 첫 페이지가 감사의 문장들로 빼곡히 채워집니다.

상근 형님과 나 ©문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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