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토론토에서 윈저로,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는 기적

12월 21일 (일) | 윈저 유정호 형님 댁

by papamoon

인생의 묘미는 늘 ‘예정된 궤도’를 벗어나는 순간에 찾아옵니다.
오늘 윈저(Windsor)로 향하는 제 여정이 꼭 그랬습니다.
본래라면 덜컹거리는 비아 레일(VIA Rail) 기차에 몸을 싣고 차창 밖 설원을 감상했어야 할 시간.

하지만 저는 지금 기차가 아닌, 상근이 형님이 운전하는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습니다.


행님이 바래다 주시는 길에 시은이 학교도 들러주셨다 ©문현호

“기차는 무슨 기차냐. 내가 여기 사는데. 내 차로 윈저까지 가자.”

왕복이면 족히 8시간이 넘는 고된 길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제 손에 들린 기차표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기어이 운전대를 잡으셨습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제게 “가는 동안 말동무나 해라”며 툭 던지시는 그 투박한 한마디.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저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떼어주는 것,

그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사랑’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겠지요.
형님의 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저를 다음 인연에게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게 인계해 주려는

'든든한 형님의 등’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형님의 과분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도착한 국경 도시 윈저.

그곳에는 제 인생의 또 다른 페이지를 장식해 준 ‘가족’, 유정호 형님과 형수님, 그리고 훌쩍 커버린 준혁이와 주연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님 가족을 떠올리면 제 기억의 시계바늘은 2006년,

적도의 태양이 작열하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되돌아갑니다.

주재원 생활을 처음 시작하며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 덩그러니 놓였던 그 막막했던 시절.

형님 내외분을 처음 뵈었을 때 제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 이분들 옆에 딱 붙어살아야겠다. 그래야 나도, 우리 가족도 이 낯선 땅에서 무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남을 수 있겠다.’

그 예감은 적중했습니다. 아니, 예감 그 이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같은 차를 타고 출근했고, 저녁이면 함께 자카르타의 영업 전선을 누볐습니다.

주말이면 나란히 교회 장의자에 앉아 기도를 드렸고, 예배가 끝나면 어김없이 식탁을 마주했습니다.

타국살이의 외로움이 틈탈 새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촘촘히 공유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피보다 진한 땀과 눈물’을 나눈 형제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그 증거는 아이들의 앨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형님은 제 딸 시은이의 돌잔치 사회를 봐주셨고, 저는 형님의 딸 주연이의 돌잔치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서로의 아이가 생애 첫 촛불을 끄는 순간, 가장 크게 박수를 치고 가장 환하게 웃어주던 사람들.

우리는 서로의 아이가 자라나는 시간을 지켜봐 준 가장 다정한 ‘증인’들이었습니다.

감사한 인연의 끈은 귀임 후 한국에서도 이어졌습니다.

형님이 광명에 터를 잡으셨을 때, 저는 성북동에서 매주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형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형님 댁은 일상에 지친 저희 가족이 숨을 쉬러 가는 주말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였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여름날의 풍경이 있습니다. 제가 형님께 농담 삼아 푸념을 늘어놓았던 날이었습니다.

“형님, 집사람이 전기세 아낀다고 에어컨을 안 틀어줍니다. 더워 죽겠습니다.”

그 철없는 투정을 들은 형님 내외분의 처방은 참으로 통쾌하고도 눈물겨웠습니다.

토요일 오전 내내 형님 집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고 저희 가족들을 초대해 주신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 큼지막한 수박 한 통을 사다 썰어주시며 말씀하셨지요.

“여기선 눈치 보지 말고 시원하게 있어라. 참, 어제 봤는데 재밌더라. 같이 보자.”

그렇게 넷플릭스로 영화 <마녀>를 다시 틀어놓고, 우리는 수박을 베어 물며 낄낄거렸습니다.

저녁에는 형님이랑 형수님이 좋아하시는 동네 맛집 ‘황소곱창’에 가서

지글거리는 곱창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시던 고마운 우리 형님.

그 무해하고 무조건적인 내리사랑 속에서 저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씻어내곤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형님 가족은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셨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우리 두 가족은 캐리비안 베이로 향했습니다.

물장구를 치며 웃고 떠들었지만, 헤어짐의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이미 성인이 된 형님의 아들 준혁이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제가 꼰대처럼, 그러나 뼈저린 진심을 담아 건넸던 말이 있습니다.

“준혁아, 삼촌이 살아보니 말이야. 네 아빠 같은 사람 만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큰 복이더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너도 살면서 꼭 그런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렴. 네 아빠처럼 진국인 사람들을 말이야.”

너무나도 감사하게 저는 형님이랑 죽고 못살고, 아내는 형수님이랑 자매처럼 각별하며,

시은이와 형님의 딸 주연이는 인생의 베프입니다.

우리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시은이의 유학지를 고민하던 시절,

결국 캐나다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 너머에 있는 단단한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낯선 땅으로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막연한 두려움을 잠재운 건, 그 어떤 유학 전문가의 조언보다

“캐나다에 정호 형님네가 계시잖아”라는 우리 가족 공통의 안도감이었습니다.

만리타국이라 해도 우리를 지켜줄 ‘비빌 언덕’이 있다는 사실.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가 캐나다를 선택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보험이자 위안이었습니다.

윈저에 도착하니, 그토록 보고 싶던 큰 딸 시은이가 달려와 품에 안깁니다.

“아빠!” 드디어 만났습니다. 토론토에서 윈저까지 400km를 달려온 이유.

야윈 듯하지만 단단해진 딸아이의 등을 토닥이니, 이제야 비로소 여행이 완성되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이 눈물겨운 상봉을 20년 지기 정호 형님 가족이 흐뭇하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오늘 밤, 윈저의 식탁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합니다.

어릴 적 세상 귀엽던 꼬마 준혁이가 이제는 몸짱 청년이 되어,

삼촌을 위해 직접 스테이크를 굽겠다고 앞치마를 둘렀습니다.

요리하는 준혁이 © 문현호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냄새 위로 인도네시아의 습한 공기, 한국 광명에서의 시원했던 에어컨 바람,

그리고 이곳 캐나다의 차가운 겨울 냄새가 층층이 쌓입니다.

창밖으로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둔 미국 디트로이트의 야경이 별처럼 반짝입니다.

윈저에서 보는 디트로이트 © 문현호


내일이면 우리는 저 강을 건너 뉴욕으로 향하겠지요.

하지만 화려한 뉴욕의 그 어떤 미슐랭 식당도 오늘 저녁 준혁이가 구워준 스테이크 맛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함께 건너온 세월의 맛, 서로를 향한 믿음의 맛이 배어 있을 테니까요.

맛있는 음식과, 내 곁을 지켜주는 오랜 인연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의 웃음소리.
저는 오늘 밤, 하나님께 조용히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들이 내 인생 굽이굽이마다 서 있어 주어서,

나의 여행은 참으로 외롭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형님, 형수님. 그리고 준혁아, 주연아. 우리 모두 정말 참 잘 살아왔네요. 모두 덕분입니다. 정말.”


형수님과 준혁이가 차려주신 저녁상 © 문현호
정호 형님과 나 ©문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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