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경을 넘어, 잠들지 않는 도시의 심장 속으로

12월 22일 (월) | 디트로이트 공항, 뉴욕 입성, 버거 조인트

by papamoon

만남은 이별을 예고하고, 머무름은 떠남을 전제로 한다지만, 정든 이의 곁을 떠나는 일은 언제나 힘듭니다.

윈저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지난밤 따뜻하고 편안했던 형님 댁의 포근한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며, 저는 짐짓 씩씩한 척 기지개를 켭니다.

“형님, 형수님. 덕분에 몸도 마음도 꽉 채워서 갑니다.”

짧은 작별 인사.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사의 무게를 형님 내외분이 모르실 리 없습니다.

현관 앞까지 배웅 나온 형님 가족의 손을 한 번 더 꽉 잡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랩니다.

지난 이틀간 상근 형님과 정호 형님이 내어주신 곁은,

마치 거친 산을 등정하기 전 전열을 가다듬는 ‘베이스캠프’처럼 든든했습니다.

그 안온한 기지(基地) 덕분에 저와 시은이는 여행자의 긴장을 내려놓고 꽉 찬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었지요.

이제는 그 안전했던 캠프를 떠나,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해야 할 시간입니다.

형수님이 차려주신 아침상, 점심으로 먹으라고 삼각김밥도 싸주셨다.©문현호


오전 9시, 우리는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가기 위해 우버(Uber)를 부릅니다.

낯선 기사의 차 뒷좌석에 몸을 싣고 나니, 이제 정말 형님들의 보호막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실감 납니다. 차창 밖으로 캐나다의 풍경이 뒤로 밀려납니다.

곧이어 도착한 국경. 캐나다와 미국을 가르는 그 경계선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육로를 통한 미국 입국은 비행기 트랩을 내려서는 것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 흐릅니다.

차에서 내려 입국 심사대로 향합니다. 미국 입국을 위한 I-94 수속을 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은 심사관의 무뚝뚝한 표정과 딱딱한 질문들.

방금 전까지 형님 댁에서 느꼈던 온기와는 사뭇 다른 냉기입니다.

“방문 목적이 뭡니까?”

“여행입니다. 딸아이와 뉴욕에 갑니다.”

여권에 ‘쿵’ 하고 도장이 찍히는 소리.

그 건조한 파열음이 마치 “이제부터는 너희 힘으로 다녀야 한다”는 세상의 선전포고처럼 들립니다.

긴장했던 시은이의 표정이 심사대를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풀립니다.

종이 한 장, 도장 하나로 국경을 넘는 이 절차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진짜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오후 2시 24분. 디트로이트 공항(DTW)에서 뉴욕행 델타항공 DL2602편이 활주로를 질주합니다.

붕, 하고 몸이 뜨는 순간, 제 심장도 덩달아 고도(高度)를 높입니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이민자들이 꿈 꾸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섰던 욕망의 용광로.

‘세계의 수도’라 불리는 그곳, 뉴욕(New York)입니다.

약 두 시간의 비행 끝에 창밖으로 성냥갑을 세워놓은 듯 빽빽하게 솟은 마천루들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회색빛 콘크리트 숲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용.

“아빠, 저기 봐! 진짜 뉴욕이야!” 시은이가 창문에 이마를 대고 탄성을 지릅니다.

비행기 창밖으로 뉴욕이 보인다 ©문현호

20대의 제가 막연히 동경만 했던 그 도시를, 20년이 흘러 20살이 된 딸과 함께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

이 기막힌 데칼코마니 같은 순간이 믿기지 않아 저는 잠시 마른세수를 합니다.

오후 4시 11분. 뉴욕 라과디아(LG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갑지만 활기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옵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경적 소리, 다국적의 언어가 뒤섞인 소음.

택시 차창 밖으로 스치는 노란색 옐로 캡(Yellow Cab)과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어서 와, 이런 복잡함은 처음이지?”라며 말을 거는 듯합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어느덧 저녁. 우리의 뉴욕 첫 끼니는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미국적인’, 그러면서도 ‘숨겨진’ 맛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화려한 레스토랑 대신 우리가 향한 곳은 낡은 호텔 로비 커튼 뒤에 숨겨져 있다는 뉴요커들의 은밀한 아지트,

‘버거 조인트(Burger Joint)’입니다.

미로 같은 길을 헤매다 발견한 네온사인 아래서 주문한 햄버거를 한입 크게 베어 뭅니다.


버거조인트 ©문현호

육즙이 뚝뚝 흐르는 두툼한 패티와 투박한 빵.

“음~ 아빠, 진짜 미국 맛이다!” 입가에 소스를 묻히며 웃는 시은이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형님 댁에서 먹었던 정갈한 집밥이 ‘편안한 고향의 맛’이었다면,

국경을 넘어와 맛본 이 햄버거의 진한 맛은 ‘낯선 모험의 맛’입니다.

콜라 한 모금을 들이키니 탄산의 톡 쏘는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넘어갑니다. 그래! 이게 바로 뉴욕 맛이지!!

식당을 나와 다시 거리로 나섭니다. 밤이 되었지만 도시는 잠들 줄 모릅니다.

반짝이는 간판들 사이로 흐르는 수많은 인파 속에 시은이와 제가 서 있습니다.

지난 3일간, 저는 과거의 인연을 확인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국경을 넘고 하늘을 날아와 미래의 시간(시은이와의 여행)을 마주하며 설렘의 땀을 흘립니다.

숙소로 돌아와 잠든 딸아이의 머리맡에 내일의 일정표를 살며시 놓아둡니다.

‘MoMA 관람’, ‘브로드웨이 산책’…. 활자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단어들입니다.

오늘 밤, 저는 낯선 침대 위에서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소음마저 자장가처럼 들리는 이 밤.

안녕, 뉴욕. 드디어 우리가 만났구나.

잠들지 않는 저 수많은 불빛들이, 내일 우리가 걸어갈 길을 환하게 밝혀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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