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화) | MoMA(현대미술관), 뮤지컬 <알라딘>
창밖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유리창을 가볍게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조금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커튼을 젖히니 차분하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이 맨해튼의 빌딩 숲을 적시고 있습니다.
현재 기온은 1도. 짓궂은 날씨가 마천루 사이를 낮게 유영하며
도시의 채도를 한 톤 낮추어 놓았지만, 제 마음의 온도는 오히려 어제보다 뜨겁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오랜 숙원이자 가슴 속에 소중히 품어왔던 버킷리스트,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찬바람에 코끝이 찡해오지만, 그마저도 "내가 지금 뉴욕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살아있는 감각으로 다가와 기분이 좋습니다.
궂은 날씨마저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이 여유,
아마도 시은이와 함께이기에 가능한 마법일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위해 향한 곳은 숙소 근처의 ‘카네기 다이너(Carnegie Diner & Cafe)’입니다.
누군가는 이곳을 ‘뉴욕판 김밥천국’이라 부른다지요.
그 말마따나 투박하고 두툼한 팬케이크와 끊임없이 리필되는 커피 잔 속에서,
우리는 뉴욕의 분주한 아침 풍경 속으로 섞여 들어갑니다.
멋 부리지 않은 이 소박한 활기가 여행자의 위장을 든든하게 데워줍니다.
오전 10시 30분. 드디어 제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버킷리스트를 꺼낼 시간입니다.
MoMA, 뉴욕 현대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했던 도시의 소음이 차단되고 정갈한 공기가 흐릅니다.
층계를 오르며 제 심장 박동도 조금씩 빨라집니다.
교과서나 달력 그림으로만 보아왔던 거장들의 숨결을 직접 마주한다는 설렘 때문입니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마주한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그 앞에 섰을 때, 저는 잠시 숨을 멈췄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의 푸른 물결과 그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노란 별들.
고흐가 병실 창밖을 내다보며 느꼈을 고독과 열망이
붓터치 하나하나에 엉겨 붙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바라보는 딸아이의 옆얼굴을 가만히 훔쳐봅니다.
고흐의 별빛이 시은이의 맑은 눈동자 속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반짝입니다.
어쩌면 제게 있어 진짜 명작은 저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라,
예술의 경이로움 앞에 감탄할 줄 아는 딸아이의 저 표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앞에 섰을 때는 마치 맨해튼 한복판에서 마법처럼
지베르니의 연못으로 순간 이동한 기분이었습니다.
거대한 파노라마 너머로 번지는 빛과 색채의 향연에 취해,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 정적 속에 머물렀습니다.
로스코의 강렬한 색채 앞에서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전율을 느끼기도 했지요. 미술관 2층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 아트까지 즐기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영혼은 뉴욕이 품은 현대미술의 심장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궂은 날씨 덕분에 미술관 내부의 고요함은 더욱 깊었고, 작품과 마주하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이제 정적인 캔버스를 떠나, 살아 움직이는 마법의 세계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저녁 7시, 브로드웨이의 뉴 암스테르담 극장(New Amsterdam Theatre) 앞은 이미 축제의 장입니다.
우리가 볼 뮤지컬은 <알라딘(Aladdin)>입니다. 입장권을 손에 쥔 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립니다.
사실 이 티켓을 예매하고 ‘결제 완료’ 버튼을 누르던 순간부터, 저는 오늘 밤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릅니다.
화려한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서 마법 양탄자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시은이도 어느새 스무 살 대학생의 티를 벗고, 눈을 반짝이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습니다.
화려한 조명, 배우들의 땀방울, 그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하나가 되어
우리를 환상의 세계인 ‘아그라바’로 데려갑니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등장해 소원을 말해 보라며 노래할 때,
저는 문득 옆자리의 딸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깁니다.
‘시은아, 아빠는 저 무대 위의 지니처럼 네 모든 소원을 뚝딱 들어줄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은 없단다.
손가락을 튕겨 너를 공주로 만들어줄 수도, 금은보화를 안겨줄 수도 없는 평범한 아빠일 뿐이지.’
하지만, 비록 마법은 부리지 못할지라도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고 싶었습니다.
네가 세상이라는 넓은 무대로 나아갈 때, 두려움 없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충실한 안내자가 되어주겠노라고.
네가 걷는 길이 어두울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혀주는 그런 사람이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아빠, 너무 재밌었어! 진짜 최고야!”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길, 상기된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우는 시은이의 미소가
브로드웨이의 그 어떤 네온사인보다 환합니다.
그 환한 얼굴을 보니, 오늘 제가 수행한 ‘안내자’의 역할이 제법 성공적이었나 봅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타임스퀘어의 밤거리는 여전히 대낮처럼 밝습니다.
오늘 하루, 미술관의 고요한 별빛과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조명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영혼은 한 뼘 더 자랐을까요.
침대에 누워, 오늘 본 고흐의 소용돌이와 지니의 램프를 떠올려 봅니다.
예술이 주는 위로와 마법 같은 환상이 있어, 여행자의 밤은 참으로 달콤합니다.
“시은아, 오늘 네 눈 속에 담긴 별들이, 네 꿈속에서도 빛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