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뉴욕의 크리스마스 이브, 스테이크와 딤섬 사이

12월 24일 (수) | 갤러거 스테이크하우스, 카네기홀, 딤섬팰리스

by papamoon

누군가 “뉴욕은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도시다”라고 했던가요.

그 말이 결코 문학적 과장이 아님을, 12월 24일의 맨해튼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빌딩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겨울바람조차도 오늘은 춥다기보다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거리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캐럴, 건물 전체를 거대한 빨간 리본으로 묶어 선물 상자처럼 포장한 백화점의 쇼윈도, 그리고 저마다 머리에 산타 모자를 쓰거나 붉은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마치 도시 전체가 현실의 빗장을 풀고 거대한 동화책 속으로, 혹은 우리가 수없이 봐왔던 크리스마스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우리를 잡아끄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만큼은 이방인인 우리 부녀도 그 영화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보기로 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 뉴욕! ©문현호

설렘으로 부풀어 오른 가슴을 안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맨해튼의 심장부에 위치한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입니다.

밖은 축제의 소란스러움으로 들썩이지만, 도서관 입구를 지키는 두 마리의 거대한 사자상,

‘인내(Patience)’와 ‘불굴(Fortitude)’ 사이를 지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짓말처럼 고요한 정적이 우리를 감쌉니다.

뉴욕공립도서관 상징 사자상 © 문현호

이곳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지식과 역사 앞에 바치는 신전처럼 느껴집니다.

대리석 계단을 밟고 올라가 마주한 ‘로즈 메인 리딩 룸(Rose Main Reading Room)’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축구장만 한 크기의 광활한 홀, 높은 천장에 그려진 몽환적인 구름 벽화,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의 황금빛 조명. 수많은 책이 꽂힌 서가 아래서 묵묵히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입니다.

시은이 역시 그 웅장한 공간감에 압도된 듯, 발걸음 소리조차 죽이며 천장과 서가를 번갈아 올려다봅니다.

딸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도서관의 풍경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입니다.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시작하기 전, 차분하게 마음을 씻어내고 정갈하게 다듬는 이 시간은 우리 여행의 가장 품격 있는 에피타이저가 되어줍니다.

뉴욕공립도서관 © 문현호

도서관을 나서 다시 거리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맛있는 냄새가 잊고 있던 허기를 일깨웁니다. 오늘 점심은 특별한 날에 걸맞은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수많은 검색과 현지 평가를 꼼꼼히 비교 분석한 끝에, 아빠가 야심 차게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바로 ‘갤러거 스테이크하우스(Gallaghers Steakhouse)’입니다.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항공사 승무원들이 ‘뉴욕에서 가장 실패 없는 선택’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곳이라니, 문을 여는 순간부터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입구에 위치한 투명한 숙성실(Meat Locker)이 시선을 강탈합니다. 붉은 조명 아래 질서 정연하게 진열된 고기들은 이곳이 맛에 대해 얼마나 진심인지를 무언으로 웅변하는 듯합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니 숯불 향이 밴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며 식욕을 돋웁니다.

드디어 눈앞에 놓인 두툼한 스테이크. 겉은 바삭하게 익어 짙은 갈색을 띠고, 속은 선홍빛 육즙을 가득 머금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는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와도 같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시은이가 고기를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만족감이 전해져 옵니다.

아이의 입가에 묻은 육즙을 닦아주며, 아빠로서 느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맛봅니다.

갤러거스테이크하우스 © 문현호

식사를 마치고 나온 오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뉴욕의 크리스마스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명품 매장들의 화려한 쇼윈도가 줄지어 선 5번가(5th Avenue)는 그야말로 빛의 바다입니다.

걷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신 거리를 지나, 전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인 록펠러 센터 앞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뉴욕 크리스마스의 상징인 거대한 트리가 위용을 드러냅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전나무 위, 수만 개의 전구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내는 광경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코끝이 빨개진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트리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댑니다.

시은이 역시 그 거대한 빛의 향연 앞에서 넋을 잃고 트리를 올려다봅니다.

오색 찬란한 빛이 딸아이의 맑은 눈동자 속에 그대로 맺혀 반짝이는 것을 봅니다.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서 케빈이 홀로 서서 소원을 빌었던 바로 그 장소.

록펠러센터 크리스마스트리 © 문현호

저는 영화 속 케빈의 엄마보다 더 간절하고 깊은 아빠의 마음으로 트리 앞에서 조용히 두 손을 모읍니다.

이 눈부신 불빛들이 훗날 내 딸들이 걸어갈 인생의 길목마다 비추는 따스한 등불이 되어주기를.

록펠러 센터의 압도적인 화려함을 뒤로하고, 우리는 좀 더 아늑하고 낭만적인 풍경을 찾아 브라이언트 파크의 ‘윈터 빌리지(Winter Village)’로 향합니다.

공원 전체가 거대한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변신한 이곳은 마치 유럽의 작은 마을을 옮겨 놓은 듯합니다.

유리로 된 작은 상점(Kiosk)들이 보석 상자처럼 빛나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따뜻한 핫초코가 들려 있습니다. 투명한 아이스링크 위를 지치며 웃음 짓는 사람들과 공원을 가득 메운 캐럴 소리. 아기자기한 오너먼트를 구경하는 시은이의 얼굴에도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집니다.

록펠러 센터가 보여주는 '도시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손에 잡힐 듯 따스하고 몽글몽글한 온기가 우리를 감쌉니다.

브라이언트 파크 윈터 빌리지 © 문현호

어둠이 짙게 깔리고 도시의 네온사인이 별처럼 쏟아지는 저녁, 우리는 좀 더 우아하고 서정적인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카네기홀(Carnegie Hall)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에서 듣는 ‘뉴욕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이브 공연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홀, 붉은색 벨벳 의자에 앉아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순간. 지휘자의 손끝에서 시작된 현악기의 선율이 홀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합니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만들어내는 섬세한 화음이 공기를 타고 흐르는 순간, 거리에서의 소란스러움과 들뜨는 마음은 씻은 듯 사라지고 깊고 경건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음악은 언어를 뛰어넘어 마음에 직접 말을 건넨다고 했던가요.

옆자리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선율에 몸을 맡긴 시은이의 평온한 옆모습을 훔쳐봅니다.

어느새 훌쩍 자라 아빠와 나란히 앉아 클래식의 깊이를 즐길 줄 알게 된 딸아이가 대견하고 또 뭉클합니다.

이 아름다운 선율 속에 우리 부녀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인생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족과 함께 눈을 맞추고 같은 감동을 공유하는 ‘시간’ 그 자체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카네기홀 뉴욕스트링 오케스트라 공연 © 문현호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 입김이 하얗게 피어오르지만, 우리 부녀의 ‘진짜’ 파티는 이제부터입니다.

화려하고 우아했던 하루의 마무리는 가장 우리다운 방식, 가장 편안한 맛으로 회귀합니다.

우리는 지체 없이 ‘딤섬 팰리스(Dim Sum Palace)’로 향합니다.

딤섬 팰리스 © 문현호

사실 고백하건대, 저와 시은이는 못 말리는 ‘중식 마니아’입니다.

아무리 미식의 천국 뉴욕이라지만, 며칠간 이어진 버터와 치즈, 그리고 스테이크의 향연에 한국인의 위장은 조금 지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느끼해진 속을 달래는 데는 역시 입안 가득 뜨끈하게 퍼지는 샤오롱바오의 육즙만 한 게 없습니다.

제가 여행 일정 곳곳에 뉴욕에서 좀 한다하는 중식당들을 보물찾기 지도처럼 숨겨둔 것도, 다 이런 상황을 대비한 아빠의 치밀한 ‘빅 픽처’였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대나무 찜기 뚜껑을 열자, 촉촉하게 익은 딤섬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얇은 피 속에 육즙이 찰랑거리는 샤오롱바오를 조심스럽게 집어 호호 불며 입에 넣는 딸아이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납니다.

만족스러웠던 샤오롱바오 © 문현호

웅장한 카네기홀의 여운도 좋고,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의 풍미도 훌륭했지만, 늦은 밤 아빠와 마주 앉아 딤섬 한 점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는 이 시간이 어쩌면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모릅니다.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식당을 나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뉴욕의 밤거리는 여전히 잠들 줄 모르는 불빛들로 번쩍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의 크리스마스.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과 장식들 속에서 제가 발견한 진짜 빛은, 네온사인이 아니라 마주 보고 웃는 가족의 사랑입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루돌프의 방울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제 귓가엔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던 시은이의 웃음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캐럴처럼 맴돕니다.

이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가 시은이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국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사랑하는 아내와 우리 막내 예은이도 이 따뜻한 마음을 함께 느끼고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바라보는 달과 우리가 느끼는 사랑의 온도는 같을 테니까요.

주머니 속에서 따뜻해진 핫팩을 꺼내 시은이의 손에 쥐여주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려 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우리 여보. 그리고 시은이, 예은아. 우리 가족 모두,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합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뉴욕의 크리스마스 이브 © 문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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