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목) | 조스피자, 탑뷰 버스 투어, 타임스퀘어 야경
요란했던 이브의 밤이 지나고, 뉴욕에 진짜 성탄절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오늘 거리 곳곳을 메우던 캐럴도 오늘따라 한결 차분하게 들립니다.
밤새 파티를 끝낸 도시가 늦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우는 듯한 공기.
그 느긋한 리듬에 맞춰 우리 부녀도 오늘은 조금 느리게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숙소를 나서며 호기롭게 향한 곳은 패스트푸드점 ‘웬디스’였습니다.
30년 전 아내와의 추억이 서린 (이제는 한국에서 사라져 버린)
웬디스에서 칠리 수프로 속을 달래려던 계획이었죠.
하지만 아불싸,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문이 굳게 닫혀있네요.
여행이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지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을 스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제, 엄청난 인파에 혀를 내두르며 포기했던 ‘조스피자(Joe's Pizza)’입니다.
‘설마 오늘도 사람이 많겠어?’ 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조스피자 대기줄이 제법 만만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추석 명절, 다들 고향으로 내려가 텅 빈 서울 시내를 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뉴요커들도 오늘은 집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 악명 높은 웨이팅 없이, 여유롭게 가게 안으로 입성하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주문한 메뉴는 심플합니다. 저는 클래식한 페퍼로니, 시은이는 신선한 카프레제 피자.
갓 구워져 나온 따끈한 피자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왜 이곳이 뉴욕 3대 피자인지 단번에 이해가 갑니다.
바삭한 도우와 진한 치즈의 풍미. 유명한 건 다 이유가 있나 봅니다.
맛도, 가격도, 그리고 제 얼굴만 한 넉넉한 크기까지 모든 게 만족스럽습니다.
칠리 수프의 뜨끈함 대신 피자의 고소함으로 배를 채우며 시은이와 마주 보고 웃습니다.
계획은 빗나갔지만, 덕분에 우리는 이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아침을 선물 받았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선 곳은 버스 정류장.
오늘은 두 발로 걷는 대신, 바퀴 달린 전망대에 몸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빨간색 ‘탑뷰(TopView) 2층 버스’가 위풍당당하게 우리 앞에 멈춰 섭니다.
2층 맨 앞,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걷거나 지하철을 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버스 창가라는 액자를 통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쇼윈도 위층에 걸린 낡은 간판들, 바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100년 된 건물 외벽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들….
어제 록펠러 센터의 트리가 화장을 곱게 한 뉴욕의 완벽한 ‘풀메(Full Make-up)’였다면,
오늘 버스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화장을 싹 지운 뉴욕의 ‘민낯’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꾸미지 않은 민낯이 왠지 모르게 더 정겹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지만, 우리 부녀의 어깨는 따뜻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시간.
버스는 업타운과 다운타운을 오가며 도시의 혈관을 유유히 흐릅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찾은 곳은 ‘달라스 BBQ(Dallas BBQ)’입니다.
입구부터 왁자지껄한 소음과 달콤한 바비큐 소스 냄새가 진동합니다.
식탁 위에 올라온 것은 제 얼굴만 한 거대한 폭립(Pork Rib)과 산더미 같은 감자튀김.
“와, 이건 손으로 뜯어야 제맛이지!”
우리는 잠시 체면을 내려놓고, 원시인처럼 양손에 고기를 들고 뜯기 시작합니다.
입가에 붉은 소스가 묻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어제의 우아한 스테이크도 좋았지만, 오늘의 이 투박하고 거친 바비큐가 주는 해방감 또한 여행의 묘미입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도착한 곳은 타임스퀘어(Times Square).
뉴욕의 밤은 낮보다 밝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곳.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전광판들이 대낮처럼 환한 빛을 뿜어내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그 빛의 홍수 속에서 탄성을 지릅니다.
“Happy Holidays!”
전광판에 흐르는 문구 아래서, 우리는 수만 명의 인파 속에 섞여 섭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속삭이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빛을 바라봅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이 도시에 모인 사람들. 비록 언어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평화를 빌고 있겠지요.
문득 아침에 피자가게에서 느꼈던 뜻밖의 행운과,
지금 이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느끼는 벅찬 전율이 묘하게 겹쳐집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때로는 우연히 마주친 풍경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뉴욕이 제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걷지 않고 달리는 차창 너머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여유가, 치열하게 걷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저물어가지만, 우리 부녀의 여행은 아직 한창입니다.
“잘 자라, 우리 딸. 그리고 계획보다 더 멋진 하루를 선물해 준 뉴욕,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