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구겐하임에서 쓴 아빠의 반성문

12월 26일 (금) |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by papamoon

26일 아침, 뉴욕은 여느 때처럼 분주한 소음으로 깨어나고 있었지만,

우리 숙소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아빠, 나 머리가 좀 아파."

이불 밖으로 겨우 얼굴만 내민 시은이의 볼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손을 짚어보니 뜨끈한 열감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집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탁자 위에 펼쳐진 여행 계획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빽빽하게 적힌 시간 단위의 일정들. 욕심이었습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뉴욕이라는 핑계로, 아빠의 욕심이 딸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간 공부만 한다고 체력이 약해진 아이를 데리고 매일 만 보, 이만 보를 걷게 했으니

탈이 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 빡빡한 일정들 사이에 숨 막혀했을 아이의 피로를 왜 진작 읽어내지 못했을까요. 모든 것이 제 탓이라는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은 다 취소하자. 그냥 숙소에서 푹 쉬자. 약 먹고 한숨 자면..."

제가 황급히 일정표를 덮으려 하자, 시은이가 힘없는 손으로 제 팔을 잡았습니다.

"아니야, 아빠. 나 진짜 괜찮아. 그냥 하루만 푹 쉬면 나을 것 같은 감기야.

오늘은 그냥 아빠는 아빠 좋아하는 미술관 투어 일정으로 하고, 나는 숙소에서 좀 쉴께.

컨디션이 회복되면 저녁에 만나서 외식하자."

아픈 와중에도 일정을 망칠까 봐 아빠를 배려하는 딸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했습니다.

결국 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숙소를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화려한 뉴욕의 거리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홀로 도착한 구겐하임 미술관의 나선형 통로는 평소라면 감탄하며 걸었겠지만,

오늘은 그저 멍하니 발걸음만 옮길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브리엘레 뮌터의 <잠자는 아이와 엄마>라는 작품 앞에 멈춰 섰습니다.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고 깊이 잠든 아이의 붉은 뺨이

아침에 두고 온 시은이의 얼굴과 겹쳐 보여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화려한 풍경보다 편안한 휴식이었을 텐데,

아빠의 욕심이 앞섰던 건 아닌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가브리엘레 뮌터의 <잠자는 아이와 엄마> © 문현호


미술관을 나오며 곧장 시은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시은이는 금방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빠, 나 한숨 자고 났더니 열도 내리고 컨디션도 좋아졌어! 걱정 말고 남은 일정도 잘 보고 와."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생기 있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꽉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침 내내 흐릿해 보였던 뉴욕의 풍경에 그제야 밝은 빛이 도는 것 같았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향한 휘트니 미술관은 아침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내어주었습니다.

통창 너머로 길게 뻗은 하이라인의 철길을 바라보며,

'내일은 꼭 저 길을 시은이와 나란히 걸어야지' 하는 기분 좋은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테라스에서 마주한 뉴욕의 칼바람조차 자책으로 무겁던 머릿속을 맑게 깨워주는 응원처럼 느껴졌습니다.

휘트니 미술관 테라스 © 문현호

미술관을 나서는 길, 뉴욕의 하늘은 어느덧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숙소 근처 ‘팁시 상하이(Tipsy Shanghai)’로 향합니다.

중식을 좋아하는 시은이를 위해 여행 전 설레는 마음으로 미리 찾아두었던 곳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요리를 사이에 두고,

혼자 감내해야 했던 아침의 무거운 걱정과 이제야 찾아온 평온한 마음을 딸아이와 나누고 싶습니다.

그 다정한 대화의 시간이 간절해질수록, 뉴욕의 밤거리를 걷는 제 발걸음에도 기분 좋은 속도가 붙습니다.


시은아, 아빠 욕심에 고단했을 텐데 잘 견뎌줘서 고마워.

남은 여행은 서두르지 말고, 이제부턴 딱 우리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보자.

아빠가 진짜 진짜 미안하고 사랑해.

식사를 하는데 창 밖으로 눈이 왔다 © 문현호



keyword
작가의 이전글#6. 계획은 꽝, 피자 맛은 잭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