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위해 수집한 정성스러운 정보, 사랑 듬뿍 담긴 도슨트 수첩
이 글을 쓴 지난 1월 12일, 서울에는 눈이 내렸습니다. 거실 통창 너머로 바라보는 뒷산의 풍경이 포근합니다. 소나무 가지마다 얹힌 하얀 눈송이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릴 때면, 세상의 소란이 그 정적 속에 가만히 잦아드는 것 같습니다. 주방에서는 아침부터 아내가 끓이고 있는 곰탕 냄새가 구수하게 집안을 채웁니다. 이 정겹고도 평범한 일상의 공기 속에, 제가 좋아하는 존 바티스트(Jon Batiste)의 'It's All Right'가 흐릅니다.
디즈니, 픽사 영화 <소울(Soul)>의 OST로 잘 알려진 이 곡의 경쾌한 피아노 선율을 듣고 있으면, 제 마음은 어느새 시공간을 건너 지난 12월 하순 15박 16일간 큰딸과 함께했던 뉴욕의 그 차갑고도 뜨거웠던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음악은 참 힘이 세지요. 냄새와 소리는 때로 가장 강력한 타임머신이 되어 우리를 가장 그리운 곳으로 데려다 놓곤 하니까요.
이 곡을 들으면 저는 자연스럽게 뉴욕 미트패킹 지역의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을 떠올립니다. 휘트니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는 현재의 미국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미술관 테라스가 허드슨 강과 하이라인 파크를 향해 시원하게 열려 있듯, 존 바티스트의 재즈 역시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우리네 삶을 긍정하는 다정한 기운을 담고 있습니다.
아빠라는 이름의 도슨트
휘트니의 개방적인 공간에서 이 선율을 마주했을 때, 난해하게만 느껴지던 현대미술조차 결국 다 우리 삶의 이야기라고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테라스 문을 열었을 때 훅 끼쳐오던 날카로운 강 바람, 발 아래 하이라인을 걷던 사람들의 활기, 그리고 귓가에 흐르던 경쾌한 피아노 선율.
"그래, 이 순간을 느끼려고 여기까지 왔지."
여행 중 가장 낭만적이고 홀가분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서울의 눈 내리는 오후를 다시 뉴욕의 겨울로 물들입니다.
이번 여행은 제 인생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큰딸의 손을 잡고 인류의 찬란한 유산을 직접 마주하는 일. 유홍준 교수가 그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두에서 고백했듯, 저는 딸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그 경이로운 경험을 뉴욕에서 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 두 달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도슨트가 되기 위한 준비에 썼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딸을 향한 사랑이 만들어낸 자발적인 몰입이었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돌아와서도 노트북 앞에 앉아 각 미술관들의 홈페이지를 뒤지고, 수십 개의 도슨트 영상과 책을 탐독하며 각 작품에 담긴 화가의 생애와 그들이 기록해낸 시대의 숨결(때로는 깊은 고뇌였고 때로는 찬란한 희열이었을) 그 모든 삶의 무늬를 수첩에 눌러 담았습니다.
혹여나 아빠의 설명이 지루한 지식의 나열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이 위대한 작품들이 딸의 삶에 따뜻한 위로와 용기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고흐의 거친 붓질 뒤에 숨겨진 절박함을, 모네의 흐릿한 수련 너머에 있는 빛에 대한 집념을 딸이 이해하기 쉬울 언어로 풀어보려고 애썼던 시간들. 그것은 고단한 공부가 아니라, 딸에게 보여줄 세상의 보물 지도를 정성껏 그려나가는 가장 설레는 준비의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거창한 미술 평론이 아닙니다. 예술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삶의 충만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최근 3년 중 뉴욕에 가장 눈이 많이 왔다던 날, 온 세상이 하얀 눈 아래 묻혀버린 정적 속에서 센트럴파크를 가로질러 도착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의 압도적인 풍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5000년 인류의 유산이 첩첩이 쌓인 그 거대한 미로 속에서, 저는 바쁜 일상과 철저히 구별된 공간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이 인간을 얼마나 겸허하게 만드는지 배웠습니다.
일상의 전경을 사랑하기 위하여
또한, 2026년 새해 첫날 아침, 관광객들은 아직 잠든 시간 미술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선 현대미술관(MoMA)의 한적한 복도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단둘이 독대하며 느꼈던 벅찬 전율은 제 평생의 보석 같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타인의 시선 없이 오롯이 마주한 거장들의 원화는 제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당신의 고통도, 당신의 사랑도 결국 이 캔버스처럼 위대한 역사가 될 것"이라고요.
딸의 컨디션 난조로 홀로 걸어야 했던 구겐하임의 나선형 복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 덕분에 저는 가브리엘레 뮌터의 그림 앞에서 아빠로서의 미안함을 내려놓고 뜻밖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더욱 아름다운 의외성을 선물하곤 합니다.
앞으로 이어질 이 이야기는 딸을 사랑하는 아빠의 정성스러운 도슨트 수첩이자,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가 여행자에게 베풀어준 다정한 축복의 기록입니다. 담백한 목소리로, 하지만 누구보다 진실했던 아빠의 마음을 담아보겠습니다. 제가 준비하고 사유했던 이 기록들이 뉴욕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길잡이가 되고, 일상의 무게에 지친 분들에게는 잠시 숨을 고르며 존 바티스트의 재즈를 듣는 듯한 편안한 휴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곰탕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는 주방에, 창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송이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정성스러운 시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 바티스트의 선율처럼 경쾌하게, 하지만 고흐의 붓질처럼 묵직한 진심을 담아 그 첫 페이지를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