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A ①] 차원 다른 본질과 마주하며 만난 전설의 원화들
이번 여행에서 딸에게 재미있는 말을 하나 배웠습니다. 이름하여 '미국 차원 달라병'입니다. 미국의 음식이나 생필품들이 우리가 알던 기준을 훌쩍 넘어서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압도감을 준다는 뜻이라네요. 실제로 이번 뉴욕 여행에서 차원이 다름을 실감한 순간이 딱 두 번 있었습니다.
하나는 뉴욕의 피자였습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이 새어 나왔습니다. 이래서 닌자 거북이들이 그렇게 피자에 진심이었구나 싶어,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군요. 입안 가득 퍼지는 진하고도 솔직한 맛은, 묘하게도 뉴욕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에너지와 닮아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미술관에서 찾아왔습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거장들의 원화를 실물로 마주했을 때의 그 거대한 울림입니다. 특히 뉴욕 현대 미술관(MoMA) 5층에서 만난 고흐의 작품들은, 그것이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라 화가의 생생한 고통과 희망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입체적인 기록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붓질에 새겨진 고독과 희망
5층 갤러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것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이 그림 앞에 모여 저마다의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그 소란함 속에서도 원화가 내뿜는 힘은 정직합니다.
캔버스 가까이 다가가 그림의 옆면을 슬쩍 들여다보면, 물감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라 있습니다. 물감을 튜브에서 직접 짜내어 짓이기듯 칠한 임파스토 기법의 흔적들은 고흐가 그 밤에 쏟아부었을 고독의 깊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화면 왼쪽에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검푸른 사이프러스 나무는 불꽃처럼 일렁이며 우리의 시선을 우주로 끌어올립니다. 달 옆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금성의 광채는, 절망의 끝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눈부신 희망이었겠지요. 그 거친 붓질을 보고 있으면, 화가의 지독했던 외로움이 역설적으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옆에 나란히 걸린 <올리브 나무>는 조금 더 낮은 곳의 평온을 이야기합니다. 하늘로 치솟던 사이프러스 대신, 대지의 열기를 머금고 은빛으로 물결치는 올리브 잎사귀들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뒤틀리며 자라난 나무 기둥에서 고단했던 자신의 삶을 발견한 고흐는, 그 시련의 굴곡조차 생동감 넘치는 무늬로 승화시켰습니다.
캔버스 위의 소용돌이치는 필치를 보고 있으면, 자연은 우리에게 정답을 주지는 않지만 늘 묵묵히 곁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꺾이지 않고 뒤틀림 그 자체를 아름다움으로 바꾼 그의 붓질을 보며, 곁에서 그림에 몰입해 있는 딸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삶의 굽이치는 길목에 서게 될 때, 그 굴곡들이 모여 결국 너만의 단단하고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건네보았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꼭 이래야만 해?"라고 묻는 용기
고흐의 서정적인 소용돌이를 지나면, 우리의 시각 체계를 흔들어 놓는 파블로 피카소와 마주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앞에 서면, 당시 사람들이 왜 그토록 이 그림에 경악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갑니다.
500년 넘게 서구 미술을 지배해온 원근법과 단일 시점이라는 규칙을 피카소는 단칼에 베어버렸습니다. 아프리카 가면의 강렬한 생명력을 캔버스에 이식하고,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구겨 넣은 이 다시점의 혁명은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보는 것이 정말 세상의 전부니?'라고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균형과 조화가 실은 얼마나 연약한 약속이었는지 그는 사정없이 파헤칩니다. 익숙한 것을 파괴하는 그의 용기 앞에서 저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어지는 <머리 단장하는 여인>에서는 그 시선이 더욱 처절하고 날카로워집니다. 일상적인 머리 단장의 순간을 그린 제목과 달리, 화면 속 여인의 몸은 기괴하게 왜곡되고 거대하게 부풀어 있습니다. 좁고 폐쇄적인 공간 안에 갇힌 듯한 이 형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와 인간이 느끼는 극도의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냅니다.
사실 우리가 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얼마나 많은 포장지로 싸여 있나요. 피카소는 그 포장지를 다 찢어버리고 남은 날 것의 진실, 때로는 마주하기 두려운 인간의 내면적 심연을 마주하게 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부수고 그 자리에 들어선 뒤틀린 진실. 작품은 익숙한 편안함을 버릴 때 비로소 진짜 나의 본질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 어쩌면 피카소가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진짜 선물은, 보기 좋은 가짜보다 조금 투박하고 괴롭더라도 정직한 진짜를 마주하는 용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샤갈과 클림트] 꿈과 금빛으로 수놓은 위로
피카소가 남긴 긴장감을 달래주는 것은 마르크 샤갈의 다정한 색채입니다. <나와 마을>에서 샤갈은 가난했던 고향의 풍경을 무의식의 층위 위에 따뜻하게 펼쳐 놓습니다. 거대한 초록색 인물과 염소가 서로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습니다.
두 존재의 눈을 연결하는 저 가느다란 하얀 점선은, 우리 존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영적인 연결 고리 같습니다. 물리적인 거리를 넘어 정신적으로 연결된 대상이 있다는 것, 그 기억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샤갈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초록색으로 우리를 다독이며, 마음속에 간직한 소중한 기억이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속삭입니다.
그 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희망 II>는 또 다른 위로를 건넵니다. 금색 무늬의 화려함 속에 임신한 여성과 그 아래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공존시킨 이 작품은,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에 이미 깃들어 있는 죽음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그는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눈부신 장식으로 덮으며 삶을 긍정했습니다.
지평선 없이 나뭇잎의 질감으로만 가득 채운 그의 또 다른 작품 <공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선이 길을 잃게 만들면서도 그 무수한 점들 사이에서 자연이 가진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게 하는 묘한 평온을 선사합니다. 때로는 큰 그림을 보려 애쓰기보다, 눈 앞에 놓인 작은 점 하나하나에 집중할 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침묵으로 가르쳐줍니다.
보석처럼 박힌 무수한 초록점들은 마치 우리네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거대한 숲을 이루는 과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이 작품 속 무수한 점들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힐링'의 순간을 맛보게 됩니다.
[마티스와 몬드리안] 생의 리듬과 우주의 뼈대
이제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가 초대하는 생의 기쁨 속으로 들어갑니다. <춤 (I)>에서 보여주는 최소한의 색채와 곡선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순수함을 환기합니다. 붉은 빛의 인물들이 손에 손을 잡고 강렬한 푸른색 배경 위에서 원을 그리며 춤추는 리듬을 보고 있으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저 단순한 연결과 춤사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티스의 소망대로 그의 작품은 지친 영혼이 잠시 쉴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평온함을 줍니다.
마티스의 화려함 곁에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고독한 눈빛이 있습니다. <안나 즈보로우스카>의 길게 늘어진 목과 눈동자 없는 눈은 모델의 외형이 아니라 그 너머의 영혼을 응시하게 합니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보는 이가 자신의 내면을 그 빈 공간에 채워 넣게 만드는 모딜리아니의 마법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선물합니다. 비어있기에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그 눈동자를 보며 저는 깊은 침묵 속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5층 여정의 마무리는 모든 군더더기를 걷어낸 피트 몬드리안의 작품이 장식합니다. 직선 하나를 긋기 위해 수개월을 고민했던 그의 절제는 삼원색과 무채색, 그리고 수직과 수평의 선만으로 완벽한 우주의 균형을 이뤄냅니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냈을 때 무엇이 남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뉴욕의 화려함에 취해있던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힙니다. 몬드리안의 캔버스는 복잡한 감정의 파도를 걷어내고 남은 삶의 가장 단단한 뼈대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가장 단순한 진리인 정직하게 살고, 사랑하고,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의 기록을 빌려 나만의 일기를 쓰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흐의 소용돌이에서 나의 불안을 다독이고, 피카소의 해체에서 가식의 껍데기를 벗겨내며, 몬드리안의 직선에서 삶의 군더더기를 깎아내는 그 찰나의 순간들 말입니다. 거장들이 평생을 바쳐 부수고 해체하며 찾아낸 그 본질은, 결국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지탱하는 아주 작고 단단한 마음의 뼈대였음을 깨닫습니다.
미술관 문을 나설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번잡하고 거대한 뉴욕의 소음이었지만, 딸의 손을 잡은 제 마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고요하고 단단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진짜 차원이 다른 것은 외형의 크기가 아니라, 그 크기에 압도되지 않고 나만의 본질을 지켜내는 마음의 깊이라는 것을, 5층의 거장들은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