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이 발견되고, 정의된 건 언제부터일까?
'암'이란 존재가 인간이 과연 극복을 할 수 있는 존재일까?
석사과정 시절, 문득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떠오른 궁금증이었습니다.
프로젝트 중간 평가를 대비해 참여 팀들 모두가 모인 세미나였는데, 그날따라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의견들을 허심탄회하게 제시해 주신 덕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다양한 각도로 들어볼 수 있던 자리였습니다.
"임상 쪽 입장은 그래요, 마커를 발견했다고 논문이 나와도.. 그게 쓸 수가 있냐는 거죠."
"일단, 발견이 돼야, 수차례 검증도 하고 그럴게 생기는 거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선 뭐 있습니까?"
"가끔은 연구비로 몇천억씩 쓰느니, 차라리 이 돈으로 환자들에게 치료비 지원을 하면 몇백 명은 더 살리지 않았을까... 싶을 때도 있고."
"그 마음은 저도 그렇죠, 근데 그렇게 하다 보면 항암제나 항암치료에 발전이 있겠어요? 더 멀리 봐야죠."
"알죠, 근데.. 메커니즘이 새로 발견됐다고 해도, 이게 상용화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런 것도 좀 있고"
"그렇죠..."
각자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결국은 더 많은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깔린 자조적 문장으로 대화는 마무리 됐습니다.
"암이.. 정말 극복 가능한 질병이긴 한 걸까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선배가 흠칫 놀라 쳐다봤습니다.
암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이게 극복은 되는 건지 머릿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나와버린 참이었습니다.
"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뭐.. 그러니까 그냥.. 저는 궁금하기도 해서요.."
"뭐가?"
"그렇잖아요,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연구원들은 밤을 새워 연구를 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하는데도 안 되는 걸 보면.. 되긴 되는 문젠가 싶고..."
"..."
"아까도 봐요, 미국에만 암 연구원이 2만 명이 있대요.
그럼, 전 세계적으로는 못해도 20만 명은 되겠죠?
암이 발견된 건, 기원전 2500년 전으로 추정된다고는 하는데... 아 뭐 야박하게 잡아서 처음으로 기록에 남은 기원전 1600년 전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거진 3600년인데.
3600년을 만 명 단위의 연구원과 의사, 간호사분들이 극복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거면, 되긴 하는 걸까 싶어서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 석사생의 당돌한 질문에 박사과정 언니는 피식 웃었습니다.
"야, 너 내가 100억 줄 테니까 지금 당장 집 지어봐"
"뭔 말이에요 언니. 집을 어떻게 지어."
"그렇지? 못하겠지? 100억 준다고 하는데도."
"아.. 그거야, 갑자기.."
"그래. 갑자기. 갑자기 집을 지으려니 황당하지?
집을 지으려고 해도 재료가 있어야 되는 거야.
어떤 집이 좋은지 설계도 배워야 하고, 돌로도 지었다, 시멘트로 지었다 시행착오도 겪어봐야 해.
더 가는 돌이 필요하면 큰 돌을 깨부수어서 가루로 만드는 시간도 필요하고."
"아, 그렇겠죠. 근데.."
"근데! 연구라는 게 그렇다고.
사람이 하는 거고, 환자마다 결과도 다르니 다양성도 엄청 많아.
그래서 가까이 보면 정체되어 보이지만, 인류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
현미경도 없고, 과학이란 게 뭔지도 모를 땐, 그냥 덩어리가 있네, 이게 뭐지?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암세포를 만들어 연구용으로 쓰기도 하고, 유전자라는 것을 분석해서 막기도 하고."
"..."
"암을 극복해 보려고 항암제라는 약물도 개발했다가, 내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걸 또 극복해 보려 다른 발견을 시도하고 있잖아.
네가 말한 대로 인류는 암 극복을 실패하고 있지만, 그 실패를 디딤돌 삼아 조금씩 더 나아가고 있어.
3600년 동안 몇만 명의 노력은 다 그렇게 쌓이고 있단 얘기야."
그때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박사를 하기로요.
조금씩 내딛는 인류의 한 걸음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태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저는 그때 그 언니만큼 어엿한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여전히 암과 전쟁 중입니다.
1990년도에 시작됐던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종료되던 2003년.
인류는 드디어 인간의 몸속에 있는 유전 정보에 대해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다들 모든 질병을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었습니다.
하지만 암은, 그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가 공개된 2000년대 초반.
프로젝트 덕에 유전 정보가 모두에게 공개가 되었고, 새로운 암 조절자의 가능성을 가진 암 줄기세포(Cancer stem cell)와 RNA들의 중요성이 대두 됐습니다.
각 질병들마다 유전 정보의 특성들도 분석되기 시작됐고, 환자들의 유전 정보도 빠른 시간 내에 읽어낼 수 있는 기술도 발전해 맞춤형 진료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았죠.
인류는 다시, 곧 암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암은 인류의 공격을 더 잘 견뎌냈습니다.
그렇게 인류가 패배하는 건가 했지만, 과학은 특정 암 유발 유전자만 잘라낼 수 있는 유전자 가위 기술(CRISPR Cas9)과 암 미세환경(Tumor Microenvironment), 암세포노화 (Cancer cell senescences) 등과 같은 통합적 연구들을 시작하며, 이전까지 쌓아 올린 지식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물론, 전쟁이 끝나지도 못했고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습니다.
하지만 1년에 24만 편 정도의 암과 관련된 논문들이 보고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아직 희망을 잃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렇게 적고 보니, 암 요 녀석.. 무섭긴 합니다.
제가 박사학위를 받던 날, 제 지도 교수님이 해주신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던 단어였는데, 제게 그러시더군요.
"박사가 되고, 연구를 하고, 꼭 이 일이 아니더라고, 인생을 산다는 거 자체가 그렇더라.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가다 보면, 예상치도 못하게 어려울 일을 만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더라고.
그런데 나는 그럴 때마다 늘 저 단어를 떠올리며 버텼던 거 같아.
나는 네가 졸업을 하고,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 꼭 저 말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그땐, 그 말씀이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특히나 남편이 암 환자가 되고 난 요즘엔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정말 한 걸음씩 내 디딜 때 받침돌이 되어 주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저는 출근을 했고, 논문을 읽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졌던 남편과 함께 작업하던 논문파일을 읽고 검토를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매일 함께 토론하던 회의실에서 혼자 밥을 먹고 원본파일들을 검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상황을 도망치치 않고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르는 이번주 브런치 글도 적어냈죠!
여전히 평범한 연구원인 저에게는 '인류의 한걸음'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크게만 보입니다.
딱히 제가 이 한 걸음에 힘을 보태고 있는지도 모를 순간이 더 많기도 하고요.
아직도 인류가 내디뎌야 하는 걸음이 수십 걸음은 되어 보이고,
사소하게는 결과가 잘 안 나오거나, 해석이 어려울 때마다 암이 더 무섭게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마 암 연구를 계속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마 암 환자 보호자로서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