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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23. 2024

당신은 지루함과 잘 지내나요

무궁화 호와 KTX

  매번 4시간 걸리는 무궁화 호를 타다가 2시간 걸리는 ktx를 처음 타본 날, 2시간이 후딱 지나서 신기했다. 기차를 탄 게 맞나. 얼떨떨. 이 맛에 ktx 타는구나. 몇 번 ktx 맛을 보니, 이제 무궁화 호는 아예 탈 엄두조차 못 낸다. 이래서 ktx는 매진이 많구나.

  

  ktx 타는 2시간은 계속 짧게 느껴질 줄 알았다. 그런데, ktx도 무궁화 호와 다른 느낌으로 지루해졌다. 무궁화 호를 탔을 때 천천히 오래 지루해지는 느낌이라면 ktx는 빨리빨리 자주자주 지루해지는 느낌이었다. 

   

  뒷자리에 탄 아빠도 웅얼댄다. "아따. 2시간인데 지루하네. 거꾸로 가서 그런가." 아빠 말을 듣고, 역방향을 타서 더 지루하게 느껴지나. 지루함에 대해 잠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지루하다 :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같은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따분하고 싫증이 나다. 


  사전적 의미의 지루함은 수정되어얄 듯하다. 시간과 상태가 오래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으로 보기에 지루함은 다층적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도 지루할 수 있지 않나? 같은 상태가 계속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나? 지루하다는 건, 생각일까. 감정일까.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영화가 인생영화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책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떤 책은 앞부분은 지루하다가도 중반부부터 슬슬 재미있어지고 아주 흥미로운 끝맺음이 나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영화는 처음엔 재미있다가 지루하고 시시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


  문득, 궁금하다. 만약 타인들이 내 일상을 똑같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느낄까. 내 삶을 영화처럼 관람할 수 있다면 나는 영화에 별점 몇 개를 줄 수 있을까. 타인들이 재미없어하는 영화와 책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내 일상도 나 스스로는 매력적으로 느낄는지도 모르겠다.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시간이 꽤 오랫동안 지루했다. 눈을 뜨면 오후 두 시 걱정부터 앞섰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뭘 해도 무기력했다.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하루를 잘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 것 같은데...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뒤숭숭하고 조급해졌다. 시간이 바짝 내 뒤를 쫓는 느낌. 옆에 착 붙어서 들들 볶는 느낌. 조급한데 지루했다. 지루해서 조급해지는 것도 같았다. 우울한 채로 있기는 쉬운데, 지루한 채로 있기는 어려웠다. 


  지금은 오후 두 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 있다. 그 시간에 주로 카페에서 글을 쓴다. 전엔 지루한 감정이 앞서 글쓰기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 활동이었다. 지금은 지루함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나에게 지루한 감정은 죽음과 가까운 상태였지 싶다. 살아있는 느낌이 없으니 불안했던 거 아닐까.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 모래 빛깔. 자주색 셔츠를 입고 있어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담배 냄새가 흘러나와 노인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주색 셔츠와 담배 연기만 기억날 뿐, 노인의 얼굴은 모래 빛깔이었는데 지루하다 못해 고난이 새겨져 있었다. 그곳의 모래는 유독 하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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