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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23. 2024

온 그녀들

빼흐듀_perdu 

빼흐듀의 방문

  

 주차장에서 늙은 남자는 장작 패듯 망치를 휘두르며 전신거울을 깨부수고 있었다. 뒤이어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평소라면, 있어도 집에 없는 척하는데 얼떨결에 말이 나왔다. 


  "누구세요?" 

  "지하에 살아요. 문 좀 열어볼래요?"

 

  문을 여니 빼흐듀가 태연하게 신발을 벗고 들어와 거실에 털썩 주저앉는다. 

  "술 좀 줘요." 

  "술 없는데요." 

  "시시하다." 

  마실 것이 필요한가 싶어 보리차를 내주니 컵을 놓친다. 얼굴은 무심한데 몸과 손을 달달 떤다. 내 쉬는 숨에서 술냄새가 났다.

 

  "젊은 사람이 대낮에 집에서 뭐 해?" 

  "그냥 있어요." 

  "돌이야? 그냥 있게. 청소라도 해라. 집안 꼴이 참..." 

  어제 먹다 남긴 오징어 다리를 향해 개미가 몰려들고 있었다. 


  "시간 많으면 이야기를 써봐. 잘 쓸 것 같이 생겼네."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상실감..." 

  "어떤 상실감이요?" 

  "다 잃었지. 젊음, 사랑, 꿈, 아들... 너는 상실감 안 느껴 봤니? 

  "잘 모르겠어요." 

  "밖에 망치든 인간이 남편이야."   

  

  "조용하네. 가야겠다. 상실감에 대해 더 듣고 싶으면 언제든 지하로 와." 


  며칠 후 빼흐듀는 이사를 갔다. 주차장에는 깨진 거울 조각들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빛은 없고 눈만 남은 여자. 가끔 오래 회상한다. 빼흐듀를 잃지 않으며 살아간다.    

*perdu 빼흐듀 : 잃어버린, 잃은, 없어진, 사라진, 길을 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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