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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27. 2024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켄 리우_즐거운 사냥을 하길

  켄 리우 '즐거운 사냥을 하길'을 읽고 난 후, 독서모임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렇게 썼다.  


   “나 같은 친구들을 찾아낼 거야. 찾아서 너한테 데려올게. 너랑 나랑 같이 그 친구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자.” 염이라는 캐릭터가 참 매력적이었어요. (고울 염) 이름처럼 마음이 곱네요. 자신이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자유를 향해 가는 게 멋졌어요. 

  

 주인공 량과 염의 '우정의 연대'가 인상적이네요. 량은 아버지의 죽음 후, 염의 말대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위해 홍콩으로 떠나게 되고 “넌 지금 행복해? 꿈이 뭐야?” 재회한 염의 질문이 톱니바퀴 같이 살던 량을 변하게 만들었네요.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요즘 사냥은 잘돼? 

  우린 서로에게 어떤 안부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요? 

  

  아주 먼 훗날이 오면... 책을 읽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이 요술 같은 순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책은 영원한 요술입니다.


  정작, 나에게 줄기차게 들러붙는 인물은 주인공 량의 아버지였다. 돌 봐야 할 아들이 있는데도 스스로 죽어버린 무책임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크롬여우를 탄생시키며 자유와 미래로 향해가는 량과 염의 이야기를 해야 마땅한 와중에 나는 왜. 왜. 왜 그의 페이지에 머물러 있는 걸까.  

-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이 점점 뜸해지는 와중에 짐짓 기운 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문을 외우는 연습이나 춤추듯이 검 휘두르는 연습을 하며 보낸 세월은 다 헛수고였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92p)  


   요괴 사냥꾼이었던 량의 아버지. 그는 빠르게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기를 포기한 인물이다. 연미검을 휘두르며 요괴를 사냥하는 일. 요괴를 잡아달라는 요청이 사라지자, 그는 낙심하고 목을 맨다. 


   당신의 지식과 기술이 별 쓸모가 없어졌으니 마을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87p)


  그가 스스로 죽지 않았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량의 아버지는 요괴 사냥에만 목적이 있었지 그들의 삶에는 무관심했다. 아들인 량은 달랐다. 사냥을 하는 순간에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듣고 있었다. 요괴의 존재를 기존의 잣대로 단정하지 않았다. 량은 타자의 삶에 호기심이 있었고 접촉하고 있었다.  


  쓸모는 누가 결정하는 걸까?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당할 바에 차라리 죽겠다. 쓸모는 무엇이길래. '쓸모'를 '도움'이라는 단어로 대체해 본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쓸모 있다 여겨진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타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내포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쓸모없다 자책하는 건, 남을 돕고 싶은데 잘 안 되기 때문 아닐까. 물론 타인을 돕고 싶은 마음 이전에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돕고 싶은 마음만큼 도움을 청할 줄 아는 마음도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남자가 있으면 후리징은 아무리 멀리서도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

 

  염과의 만남으로 량은 살아남기 위해 홍콩으로 떠난다. 기관실에서 톱니바퀴처럼 살아가던 량. 염과 우연히 재회하게 되는데 사실은 다르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서로가 서로를 불러낸 것은 아닐까. 결국,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요술은 타인에게 간절하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닐까. 량에게는 대화하고 의지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염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량의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나도 어쩌지 못할 삶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마냥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서로를 향해 건네는 손길. 안부야 말로 끝까지 살아남을 요술이 아닐까. 무엇보다 지금과 다르게 살 수 있다는,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은 중요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작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주고받음 속에 우정 속에 만남 속에 자신 안의 열정을 찾을 수 있는 서로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작품을 여러 번 읽으면 인물이 또렷하게 다가와 나에게 필요한 말을 해준다. 대면하지 못하고 눈 감고 피하고 있는 현실을 인물에게서 본다. 나를 알아야 할 이유는 스스로 지켜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면 잊다가 잃거나 잃다가 잊기 쉽다. 소설 속 인물은 나를 마주하게 해 준다. 나도 잊고 있는, 혹은 사라진 나와 타인을 끄집어 내준다. 설령 사라졌다 해도 한 때를 보낸 소중함은 떠올려 주는 게 이롭다. 

  

  요술. 어린 시절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요술을 펼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서 요술의 세계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현실만 남아 때때로 공허한 것은 아닐까. 깊은 내면에서는 무언지도 모르는 무엇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유도 모른 채 찍는 사진들. 발길을 멈추게 하는 풍경들, 불현듯 찾아오는 낯선 느낌. 혹은 익숙한 느낌... 그 속에 요술의 힌트가 있는 건 아닐까. 그 조각들을 모아 놓으면 무언가 알게 되고, 요술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폐업한 상가 자리에 무인 상점들만 들어온다. 물건, 키오스크, CCTV만 있다. 로봇이 서빙하는 음식점도 늘어난다. 인간이 하던 노동을 로봇이 대체하고 있고 대체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이미 예술의 영역에서도 AI가 두각을 나타낸다.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일이든 다각도로 생각해 보면 다양한 결론에 이른다. 


  다만, 아직 막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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