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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pr 18. 2024

상처받은 기억에게  

앙앙

  붕 날았다가 마룻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 쳐졌다. 별들이 빙빙 도는 와중에도 재수 없는 녀석의 히죽히죽 웃는 몰골이 보였다. 김땡땡은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는 방식으로 힘을 과시했다. 아무도 놈을 말릴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 주변이 퍼렇게 멍들기 시작했다. 되려 티가 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힘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으니 두고 보자.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 “엄마!”를 울부짖듯 부르며 따뜻한 엄마 품에 안기고 싶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소연을 하면 엄마가 그 녀석 누구냐, 혼내주겠다, 얼마나 아팠냐. 얼굴을 호호 불어 주다가 안아주는 장면을 기대했다. 


  지금인가, 엄마에게 안길 타이밍이? 아니... 아닌데... 어? 뭐지? 이건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다. 


  엄마는 눈 주변이 멍든 나를 보고도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내가 먼저 나쁜 놈이 이렇게 해서 나를 저렇게 만들었다. 일렀다.  


  '음하하. 김땡땡, 너는 이제 큰일 났어. 각오해. 우리 엄마가 혼내줄 거야.'


  엄마는 이제 부르르 화를 내면서 녀석 이름을 대라며, 내일 학교에 가서 김땡땡을 혼쭐 내주겠다고 말할 차례였다. 하지만, 엄마는 이번에도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원래 애들은 다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크는 거야. 며칠 지나면, 멍은 빠져." 

  나는 그 녀석의 이름은 몇 번이나 말했다. “김땡땡이 그랬어.” "김땡땡이 힘세다고 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고.” 엄마는 별 대꾸 없이 주방으로 자리를 떴다. 


  얼른 엄마를 쫓아가 “엄마, 멍든 데는 계란으로 비비면 빨리 낫지?” 물었다. 엄마가 계란으로 문질러 주길 기다렸지만, 엄마는 주저하다 계란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조심조심 눈을 문질렀음에도 계란을 깨뜨리고 말았다.

 

  엄마는 그제야 화를 냈다. “여자애가 조심성이 없어. 그럴 줄 알고 계란 안 주려고 했는데... 으구,” 그때 내 마음은 와르르 무너졌다. 내 편은 없고 혼자라고 느꼈다. “엄마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엄마는 내 친엄마가 아닐지 몰라.” 엄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자라지 못하고 거기서 멈추었다. 엄마에게 몹시 실망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김땡땡 얼굴을 똑바로 보고 멍이 든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너 이제 죽었어. 우리 엄마가 너 가만히 안 둔대.” 내 거짓말이 통했는지 김땡땡은 그 뒤로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엄마 말대로 며칠 지나자 멍은 빠졌지만, 마음속 멍은 지워지지 않았다.   

  

  생일이며 크리스마스에 케이크에 초를 불어본 적도,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처음엔 내가 잘 우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준다고 믿었다. 잘 우는 나를 탓했다. 산타를 믿는 내게 엄마는 산타 할아버지는 없고, 다 부모들이 애들 몰래 선물을 사주는 거라고 말했다. 몹시 실망했다. 


  차라리 산타 할아버지가 있는데 내가 우니까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고 믿었을 때가 더 희망적이었다. 내가 울지 않으면, 산타 할아버지는 선물을 줄 테니까. 하지만, 엄마 아빠가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거라는 희망은 아예 가질 수 조차 없었다. 


  나는 내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 게 싫었다. 다른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초대되는 것도 싫었고, 산타 할아버지를 믿는 아이들과도 놀기 싫었다. 그렇다고 먼저 산타의 존재가 없다고 발설하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동네 친구집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친구네 엄마가 아이들 선물을 사자고 했던 모양이다. 분홍색 뼈대가 앙상하고 금방 망가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인형 침대였다. 무엇보다 나는 분홍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대부분 분홍색 운동화를 신었지만, 나는 파란색 운동화를 신었다. 


  선물을 받고도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저 침대에 인형을 눕혀 놓으면 인형이 너무 추울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하니... 나에게는 침대에 눕힐만한 인형이 없었다. 친구는 선물 받은 폭신폭신한 인형을 껴안고 좋아했는데 나는 친구를 따라 웃기만 했다. 


  생일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슬픔이 먼저 와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도 특별한 생일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 좀 유난스러운 친구 쏭이 쉬는 시간에 초코파이를 쌓아서 깜짝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반 친구들의 생일축하 노래가 시작되고 괜히 경직돼서 초만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태어났다고 축하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입 안이 달달했다. 마음은 부드러웠다. 쏭의 유난함이 고마웠다. 친구들 덕분에 받을 줄도 줄 줄도 몰랐던 인색했던 내가 아주 천천히 변했다.    


  지금의 나라면... 엄마가 안아주길 기다리는 대신 내가 엄마에게 와락 달려가 안길 것이다. 그리고 김땡땡이가 달리는 틈을 노려 발을 걸 것이다. 내가 발 거는 타이밍은 정확도가 100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도 안 통한다면, 앙 앙 앙 물어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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