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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pr 25. 2024

옷들의 절규를 들어본 적 있나요

  매달 7만 원만 더 쓰면 쾌적한 원룸에서 살 수 있었지만, 번번이 나의 선택은 7만 원 저렴한 방이었다. 그렇게 구한 방의 대부분은 습했고 낮이어도 어두웠다. 


 어두우면 불을 켤 법도 한데, 전기를 아끼느라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지냈다. 샤워는 대야에 물을 받아서 최소한의 물로 했으며, 머리를 헹구고 남은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나 양말을 빨았다. 한 여름 대낮에만 에어컨을 잠깐씩 틀었더니 주인아줌마가 "아가씨, 에어컨 좀 틀고 살아. 전기세 별로 안 나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겨울엔 난방텐트 안에서 전기장판도 없이 지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위가 참아졌다. 물론 봄이 무척 기다려졌지만. 


  남동생이 하룻밤 내 방에서 자고 갈 일이 있었다.  보일러를 처음으로 밤새 가동했다. 나는 덥고 답답했는데 동생은 외풍이 너무 심하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이 시려. 여기서 어떻게 사냐..."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전기장판이 놓여있었다. 동생이 사두고 간 것이었다. 


  한 날은 전기세 고지서가 안 나와서 한전에 전화를 했다. 전력 사용량이 너무 적어서 다음 달에 두 달 치가 한꺼번에 나올 거라고 했다. 

  "안 그래도 궁금했어요. 거기 사람 사는 거 맞아요?" 

  콜센터 상담사의 질문을 받는 순간 내가 투명인간으로 느껴졌다.

  "네... 사람, 살고 있어요." 


  친구를 집에 초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때마침 바퀴벌레가 나올까 봐 걱정되었다. 해외여행을 가서도 대부분 도미토리에서 묵었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도 물가가 저렴한 곳을 주로 선택했다. 젊었을 때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재미있었다. 하지만, 서른 후반이 되니 도미토리보다는 조용하게 1인실에서 지내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도미토리를 결제했다. 


  입고 싶은 옷보다 가격이 저렴한 옷을 선택했고, 미용실에서 우아한 컬의 세팅 펌을 하고 싶어도 일반펌을 했다. 펌을 하고 싶은데도 머리만 그냥 자르기도 했다. 미용사가 권하는 '영양'은 매번 거절했다. 점점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 살게 되었다.  


  재작년 메니에르로 일인실 병동에 입원을 했다. 병실에 혼자 누워 있는데 지금까지 살면서 누린 가장 호사스러운 순간이구나 싶어 울컥했다. 아파야. 누려보는구나. 일인실에서 두 밤을 자고 나니, 슬슬 압박과 불안이 몰려왔다. 20만 원을 넘는 일인실 비용이 부담스러워 편안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침 청력이 호전되기도 해서 다인실로 옮겼다. 다인실에서 하룻밤을 지냈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다시 청력이 떨어졌다. 계속 일인실에 머물렀다면 청력은 회복되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일인실을 선뜻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퇴원하는 날에도 택시 대신 배차 간격이 드문 버스를 오래 기다려서 타고 집으로 왔다.     


  스스로를 고생시키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인색하다. 나 자신에게 돈을 쓰는 일을 꺼린다. 편하게 살 수 있는 환경 대신, 불편하고 힘든 상황에 내몬다. 절약이 환경에 이롭다고 정당성을 부여할 때는 가소롭다. 절약과 인색의 경계가 모호하다. 지금까지 돈을 아끼는 일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도 아껴줄 거다. 오로지 돈만 아끼려고 인색해지지는 않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타인에게는 덜 인색한 편이다. 살아가는 순간마다 만나지는 소중한 인연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까지 인색하게 구는 건,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는 깨침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지는 못한다. 한꺼번에 바뀌기는 어렵겠지. 

  

  버리지 못하는 것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려야 할 것을 그대로 두면서 빡빡하게 비좁아진 마음을 고집스레 움켜쥐고 있는 것. 버리지 못하는 마음과 인색함은 접점이 있다. 버려야 인색함도 버려질 것 같다. 비워야 인색함도 비워질 것 같다.


  "제발. 그만 좀 입어요. 이제 편안히 쉬고 싶어요. 목이 다 늘어났어요. 이만큼 입었으면 충분해요. 더 이상 추해지고 싶지 않아요. 미련 없이 버려 주세요!" 


  옷들이 나에게 사정하고, 회유하고, 소리친다. 다행히, 오늘은 옷들의 절규를 여러 받아들였고, 묵은 신발과 가방도 정리했다. 버리면서 인색함의 늪에서 걸음 빠져나와 보려 한다. '인색하다'는 형용사지만, 나에게는 동사에 가깝게 다가온다. 




인색하다

네이버 사전 1. 재물을 아끼는 태도가 몹시 지나치다. 2. 어떤 일을 하는 대하여 지나치게 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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