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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29. 2024

여름에는 오이를 드세요

  곡물식빵 한 장을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커피를 내렸다. 키위를 깎아 담고 방울토마토를 곁들여 아침을 먹었다. 


  토방에 앉아서 완두콩을 까고 있는 아빠. 아빠를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 콩을 깠다. 콩 까기는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껍질을 벗기면 또롱또롱한 콩들이 쪼로록 붙어있다. 귀엽다. 땡글땡글 연두 노랑 순하디 순한 색의 콩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딸기 바구니로 하나 찼다. 다 깐 뒤 그것들의 색감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순해진다. 오늘 아침은 완두콩 영향을 받아, 초롱초롱했다. 잠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로. 


   연재 날짜를 맞추지 못해 한 날에 몰아서 글 세 편을 브런치에 업로드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되었는데, 업로드가 중요했다. 막상 업로드를 해도 시원하지 않다. 마음이 영 불편하다. 앞으로는 굳이 업로드 날짜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요일 연재하는 방식이 지금의 나와는 맞지 않다. 


  주로 과거에 써 놓은 글들을 업로드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점점 흥이 떨어진다. 까뮈의 '안과 겉'에 나오는 한 문장이 계속 아른아른. 살아가는 건지 회상하는 건지 모르겠다던. 과거의 글을 정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지 말까 싶다가도 '사사프로젝트'와 '시시시작'은 정리해두지 않으면 계속 미련이 남을 테니 마무리는 짓기로 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니 말도 글도 힘이 없다. 말로는 마음 마음 마음대로 떠들었지만, 새삼 느낀다. 


  인스타와 유튜브를 닫았다. 하루 6시간 가까이 그것으로 인해 돌아가던 세상이 멈추었다. 그 세계 속에 있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견고하다 믿었던 사람들과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슬픔이 바닥에 깔린다. 뒤바꾸려 노력하지 않고 둔 채 그대로 있다. 생각의 여름 cd를 틀었다. 바야흐로 여름 문턱이다. 


  여름은 오이


  싱겁고 맛없게 만들어진 오이김치. 오이를 썰 때는 재미있었다. 썰 때 석석석하는 느낌이 나에게 깻잎 절임할 수 있는 기운을 내주었다.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 어제는 줄넘기도 샀다. 


  줄넘기는 나에게 최초로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줄넘기 이단 뛰기 실기시험을 앞두고 매주 체육시간마다 연습했다. 처음엔 못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하는 횟수가 늘어갔다. 나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번번이 줄에 걸렸고 줄에 맞을까 봐 무서웠다. 


  해질 무렵이면 아무도 없는 공터에 나가 줄넘기를 연습했다. 계속 걸렸다. 그래도 계속했다. 계속, 계속.... 실기시험 전날까지 계속. 그럼에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실기시험 날. 내 차례가 되었다. 줄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 공터. 어... 어... 내가 이단 뛰기를 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나인가. 계속. 계속. 놀랍도록 줄과 몸이 가벼웠고 한 몸이었다. 줄에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없었다. 붕붕 날았다. 내가 아닌 내가 계속 줄을 돌리고 있었다. 얼떨떨했다. 어제까지 안 되던 이단 뛰기가 시험 보는 그 순간부터 가능해지다니... 믿을 수 없었다. 만점. 친구들도 놀랐는데, 그간, 이단 뛰기를 일부러 못하는 척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충분히 의심받을만하다.  나도 내가 의심스러웠으니. 어제까지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던 이단 뛰기를 해내다니. 그것도 그 순간부터.  


  마법 같았다. 이단 뛰기를 하던 순간. 세상에는 나만 존재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없었다. 이상하고 놀라운 체험이었다.  


  문득 해질 무렵, 빈 마당. 줄넘기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다시 이단 뛰기를 할 수 있을까. 몸이 천근만근이고, 무릎도 부실해질  나이에 이단 뛰기는 무리가 아닐까. 


  왜, 갑자기. 잊고 있던 이단 뛰기가 생각났을까. 그리고 한참 멀은 내 생일에, 친구에게 수영복을 사달라고 용기 내야지. 결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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