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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30. 2024

엄마가 두유를 뿜었다

나에게는 진지한 검은등뻐꾸기

  나만 깨어있나 싶은 깊은 한밤중에 새소리가 들린다. 여름 철새 검은등뻐꾸기이다. 며칠째 계속 들리는데, 어떤 날은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어떤 날은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들린다. 


  너도 깨어 있구나. 


  검은등뻐꾸기 소리는 한 번 들으면 각인된다. 언어로 치면 4음절. 소리의 높낮이가 명료하다. 다른 새소리와 달리 피아노 건반으로 음을 짚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피아노를 배웠다면, 계이름을 적었을 텐데...)


  여름초입. 대학생이었던 나와 아빠 둘이 산책을 나간 적이 있었다. 별 말없이 오솔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빠는 웃음기를 씨익 내비치며 먼 곳에 시선을 두고 말한다. 

  "홀딱벗고. 홀딱벗고. 울어서 홀딱벗고 새야. 저 새가 울면 여름이 왔다는 거야." 

   새소리? 아빠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새소리가 들렸다. 정말 놀랍게도 아빠 말대로 새소리가 '홀딱벗고 홀딱벗고'로 들렸다. 신기했다. 그 후로 여름 무렵이면 '홀딱벗고' 새소리는 기똥차게 알아차렸다. 새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아빠와 아빠와 걷던 시골길이 떠올랐다. 


  새의 본명이 뭘까?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검색창에 '홀딱벗고 새'라고 쳐 보았다. 

  오... 나온다...  

  '홀딱벗고 새'는 아빠만의 별칭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만 부르는 새 이름을 나도 알고 있다. 비밀을 공유한 느낌이었는데 검색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홀딱벗고 새'라고 부르고 있었다. 새의 원래 이름은 '검은등뻐꾸기'였다. 새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어서 좋으면서도 너무 쉽게 찾아지는 게 어쩐지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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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등뻐꾸기(indian cuckoo)는 두견이과의 조류로 뻐꾸기와 매우 비슷한 외형에 탁란을 한다. 웍훅 하고 2음절로 우는 뻐꾸기와 달리 웍헉훅(혹은 웍헉훡훅)하고 4음절로 운다. 겁이 많아 울음소리의 미친 존재감에 비해 실물을 보기는 무척 어렵다고 한다. (출처 :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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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등뻐꾸기는 제 둥지를 짓지 않고 뱁새나 오목눈이 등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둥지의 주인이 대신 제 새끼를 키우게 하는데 얌체 같은 몹쓸 행위로 보이지만, 인간의 시각일 뿐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며칠 밤, 저 새는 왜 밤에도 우는가. 질문을 품은 채 잠들기를 반복. 자기 둥지가 아닌 데 알을 낳고 보니 불안해서 잠 못 이루는 게 아닐까. 질문에서 또 다른 질문이 생겨난다. 

  "나 불안해. 나 불안해." 

  자기 불안하다고 야밤에 만천하에 광고한다? 뭔가. 이건 아니지 싶은 느낌. 불안을 대놓고 광고할 필요는 없지. 


  왜... 밤에도 울까.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늘에서야 며칠 품어 온 질문에 대한 적어도 내 보기엔 그럴싸한 생각이 떠올랐다. 알 상태로 있던 질문이 드디어 껍질이 깨지면서 부화했다. 


  검은등뻐꾸기는 밤에도 자신의 존재를 다른 대상에게 알리고 싶어서 우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보통 새들은 짝을 찾기 위해 간절히 운다. 짝짓기 철인 봄에서 여름의 초입에는 사방이 정말이지 새소리로 요란하고 떠들썩하다. 평상시 울던 소리 대신 짝을 찾을 때 부르는 소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무척 열심히다. 짝 찾기 위해 노력 않는 나는 새들에게 저절로 고개가 다 숙여진다. 


  밤에도 짝을 찾기 위해 운다? 짝을 찾기에는 낮이 더 유리할 듯싶은데... 해 떨어진 뒤, 조명 좋은 카페에서 소개팅한다 치자.  오. 괜찮은데... 호감이었다가 다음번에 대낮에 만나 거침없이 드러난 무언가에 실망해 본 경험이 있지 않나. 


  뱁새나 오목눈이 등 다른 새의 둥지에 낳아 놓은 알 (부화했다면 새끼) 때문에 우는 게 아닐까. 일종의 태교.임신을 하면 좋아하는 음악을 뱃속 아가에게 들려주는 것과 비슷하게. 부화되기 전부터 "내가 진짜 엄마란다. 내가 진짜 아빠란다." 끊임없이 소리를 들려주는 거지.  


  자신이 알을 품지는 않지만 "네 옆에는 항상 엄마, 아빠가 있어. 잘 자라 우리 아기." 자장가를 계속 불러주는 셈이랄까. 그래서 검은등뻐꾸기는 아기 검은등뻐꾸기가 다른 새소리와 헷갈리지 않게 아주 명료하고 도드라진 소리를 내는 게 아닐까. 


  이 또한, 어제 새벽에 떠오른 내 위주의 추측과 상상에 불과하다. 내가 검은등뻐꾸기가 아니니 영원히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나의 추측과 상상이 사랑을 향해 가면 좋겠다. 


  이전에는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걸 보고 파렴치하다고 생각했다. 못돼 처먹은 새 새끼라고. 그런데 왜, 둥지를 짓지 않을까. 그들만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두고 보다 알고 보니, 여름철새인 뻐꾸기는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해 오기 때문에 체력이 무척이나 소진된 상태. 둥지를 지을 기력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3개월 정도 머물렀다가 또 떠나야 하는데 짝짓기를 하고 둥지를 만들고 산란까지 해야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도 한다. 


  또한, 뻐꾸기가 탁란을 하기 때문에 다른 새들의 개체수가 자연스럽게 조절되기도 한단다. (수차례 대신 품어주고 먹이를 물어다 주며 키워내는 건 수고롭겠지만.) 뻐꾸기가 둥지를 떠나면 텃새들은 다시 산란을 한다. 그때는 한 번 키워본 경험을 휘휘 발휘하지 않을까?  


   운동 다녀온 엄마가 들어온다. 엄마는 운동 가기 전에 검은등뻐꾸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짐승은 다 집을 지어. 땅 속에 사는 것들도 거기가 집이야. 멧돼지도 새끼 낳으려고 오목한 데다가 폭신하게 자리를 만들어. 뻐꾸기는 게을러서 집을 안 짓겠지. 무슨 이유가 있겠어." 


  나는 검은등뻐꾸기에 대해 엄마가 갖고 있는 오해를 풀어줘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엄마 홀딱벗고 새가 왜 집을 안 짓냐면... 

  위의 글을 잘 간추려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막힘없이 잘 진행되어가고 있다는 뿌듯함이 찰랑이던 찰나. 


  "푸우힛!" 

  엄마 입 속에서 두유가 뿜어져 나온다. 그것도 격렬하게. 

  

  분명 웃음. 왜지. 웃긴 내용은 없는데. 

  "엄마 왜 웃었어?"

  "하나 도움 안 되는 쓸모없는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하니까."

  그때까지도 나는 검은등뻐꾸기 이야기의 진지함 속에 빠져있었다. 

  "아... 그럼 엄마는 어떤 이야기가 쓸모 있는데?"

  "건강."

  그러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엄마가 마루에 뿜어 놓은 두유 얼룩을 손으로 문질렀다. 뭔가 착잡했다. 아빠는 엄마의 반응과는 다를 거다. 홀딱벗고 새의 존재를 처음으로 나에게 알려준 사람이다. 나는 마늘을 까고 있는 아빠를 붙들었다. 


  "아빠, 홀딱벗고 새는 밤에도 울잖아." 

  "날도 안 샜는데 그것은 울어. 오늘도 얼마나 우는지." 

  "아빠, 내가 생각해 봤는데 홀딱벗고 새가 왜 밤에 우냐면..."


 아빠에게는 검은등뻐꾸기 이야기를 시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마늘 까는 일에만 집중해 있었다. 


  또 누가 있지. 검은등뻐꾸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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