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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y 30. 2024

온 그녀들

lotus _로튜스

  한 겨울에 로튜스를 처음 만났다. 그리 춥지 않은 날씨라 코트를 꺼내 입었다. 옷깃을 아무리 여며도 마음의 날씨가 진창이었던 때 로튜스를 만났고 그녀가 옆동네에 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꽁꽁 언 마음이 서서히 풀렸다. 


  무척 의기소침해져 있는 오후 2시 45분. 난데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받지 말까. 잠시 머뭇대다 받는다.   

   “어떻게 지내요?” 

   “뭐... 그냥 방에만 붙어 있어요. 걸어야 하는데...”

   “라니 씨는 달릴 수 있잖아요. 걷지 말고, 한 번 달려봐요.”

  

  나갈 힘도 걸을 힘도 없는데 어떻게 달리지. 하지만 로튜스가 말하면 들어야 한다. 핑계를 댈 구실이 없다. 로튜스의 입김이 닿으면 나는 홀씨처럼 운동장으로 훌훌 날아가버린다. 아무리 결심해도 안 되던 일이 “라니 씨는 달릴 수 있잖아요.” 로튜스의 한 마디면 가능해진다. 로튜스는 나의 엄격한 조련사다. 로튜스가 달리라고 하면 나는 무조건 달린다. 달려진다. 달려야 한다.  

  

  로튜스는 20대 초반에 소아마비가 왔다. 처음 만났을 즈음 50대 중반에는 목발 없이 천천히 걸었지만, 2년 여가 지났을 때는 목발이 필요해졌고 발가락 통증 때문에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로튜스의 집과 우리 집은 걸어서 10분 거리. 로튜스는 집으로 종종 나를 불렀다. 처음 생긴 동네친구였다. 로튜스의 남편이 없는 시간, 주로 오전에 우리는 만났다. 


   로튜스네 벨을 누르고 난 뒤, '로튜스가 없나...' 싶을 정도의 정적이 흐르면 문이 느리게 스르륵 열렸다. 몇 번을 가도 문 열리기 직전의 정적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럴 리 없음에도 로튜스의 부재처럼 여겨졌고, 초조했다. 


   로튜스 집에는 시집이 쌓여 있었다. 쌓인 시집, 그걸 보는 게 이상하게 좋았다. 맛있는 커피. 깔끔한 맛의 와인. 몸이 불편해도 로튜스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했고 다양한 김치 담그기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로튜스는 김치를 담가서 자취하는 딸에게 보내고, 사람들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잔뜩 신이 난 표정의 로튜스. 기대에 부푼 천진한 아이 같았다.  


   “먹어봐요.” 

  로튜스는 깔끔 얼큰 시원한 물김치를 예쁜 접시에 정성스레 내어 주었다. 물김치와 와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칼칼하고 시원하고 맑은 물김치에 자꾸 수저가 갔다. 그녀는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틀어주고, 와인잔이 비면 채워주었다. 앞, 뒤에 베란다가 있어 창을 열어두면 바람이 양쪽으로 통해 시원했다. 창문 밖에는 새가 먹을 수 있게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로튜스와 함께 사는 고양이 '세요'는 시간이 지나면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이 왜 세요냐고 물었더니 로튜스는 웃으며 반갑게 “안녕하세요.” 나에게 인사했다. 세요. 반갑고 예쁜 이름. 세요는 큰 방 침대 위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잘 나오지 않았다. 간식으로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녀의 집이 아니면 우리는 주로 드라이브를 했다. 시내가 아닌 한적한 외곽으로 나갔다. 그녀는 풍광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자신은 차 안에서 기다릴 테니, 나더러는 나가서 보고 오라고 했다. 나는 그녀 말대로 낯선 풍경 앞에 혼자 서 있다가 다시 차로 돌아와 내가 본 풍경을 로튜스에게 전달했다. 


  로튜스는 나를 밖으로 불러 내 교외의 바람을 쐬어 주었다. 로튜스는 바람이었다. 그녀와 대화가 잘 통하는 느낌은 없었는데, 로튜스를 만나고 오면 인상적인 장면들이 만들어졌다. 장면 속에 머물러 있다가 적으면 시가 되었다. 


   로튜스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을 해서 시를 전공했다. 작은 딸과 함께 대학을 다녔다. 두 딸과 남편과 함께 뮤지컬을 보는 걸 좋아했다. 뮤지컬 이야기를 할 때면 흥분했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꾸미는 것도 좋아했다.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늘 고민했고 계절이 바뀌면 어떤 옷과 가방을 살지 나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자신의 옷 중에 안 입는 것은 내게 맞는지 입어보라고 이것저것 권하기도 했다. 자신이 입지 않는 새것과 다름없는 옷과 신발, 모자를 나에게 주었다. 엄마와 체형이 비슷해서 그녀가 주는 것들은 엄마의 차지였다.   


  꼬막, 주꾸미, 장어, 등 제철 해산물을 듬뿍 챙겨주었다. 로튜스 덕분에 싱싱한 해산물을 실컷 먹었다. 나는 아빠가 농사지은 감자, 들기름, 옥수수를 나눴다. 


  날이 풀리자 바닷가 근처 시골집에 꽃밭을 만들고 가꾸러 부지런히 외출했다.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로튜스에게는 문제 될 게 없었다. 틈만 나면 그곳에 가서 꽃을 심었다. 나도 로튜스를 따라가본 적이 있다. 로튜스는 풀밭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정원을 펼쳐냈고 구옥을 카페로 천천히 리모델링해 드문드문 오는 손님을 받고 싶다 했다. 당시의 나는 로튜스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꿈을 꾼다. 로튜스는. 


   로튜스는 코바늘 뜨기에 푹 빠져들었다.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다. 안부를 물으면 코바늘로 떠서 만든 가방, 모자를 사진으로 보내왔다. 그녀가 배치하는 색감이 참 좋았다. 파란색 카드 지갑에 진주빛 단추. 계산을 할 때 그 지갑을 꺼내면 사람들이 이쁘다고 말해주었다. 그 후, 카멜 색이 나에게 어울릴 것 같다며 그물백을 선물했고, 보라색과 노란색 실로 정사각형 격자문양으로 엄마 휴대폰 가방까지 떠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코바늘로 떠내는 것들은 팔아도 될 만큼 훌륭했다. 떠서 완성되면 친구에게 선물하고 선물하면서 로튜스는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하며 지내고 있었다. 


  지금도 로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꿈을 향해 걸어가면서. 아마 오이로 시원하고 칼칼한 김치도 담갔을 것이고 와인과 곁들이며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금은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달리기 전이면 로튜스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 등을 떠밀어 준다. 달리는 나는 로튜스 덕분이다. 시를 쓰는 나도 로튜스 덕분이다.  



  


lotus* [로튜스]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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