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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모자

by 고라니

초등학교 때는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가고, 비가 오지 않으면 그냥 갔다. 하늘이 잔뜩 흐려도 우산을 미리 챙길 줄 몰랐다. 하교시간이 다 되어 비가 많이 쏟아지면 교문 근처에서 우산을 쓰고 우산 하나를 더 챙겨든 엄마들이 있었다.


엄마를 오래 기다렸지만 나는 혼자 집에 돌아가야 했다. 가는 동안 비가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궁금했다. 엄마는 왜 비가 오는데도 우산 없이 학교 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을까. 한 번쯤은 올 만도 한데... 내가 비를 쫄딱 맞고 집에 돌아와도 엄마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교 종이 땡땡땡 치고 집에 가야 하는데 비가 오고 우산이 없으면 나는 엄마를 기다리는 대신 신문지를 찾았다. 신문지로 모자를 접어서 쓰고 우산을 쓰고 가는 아이들을 앞질러 달렸다. 사실, 신문지 모자는 비를 피하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 신문지 모자를 쓰면, 쓸쓸한 마음이 가시고 신이 났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도로를 질주할 정도로. 나중에는 나처럼 우산이 없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문지 모자를 쓰고 달렸던 것 같다. 어쩌면 내 달리기 실력은 그때 다져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문지 모자가 있어서 빗속을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었지만, 엄마에 대한 섭섭함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왔다면 훨씬 더 신났을 것 같다. 비가 오면 친구들은 엄마가 올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엄마가 안 올 거라는 걸 알았다.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쓸쓸하다.


오지 않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내 모습이 보인다. 엄마에게 비 오면 우산 들고 데리러 와달라고 한 번쯤 말해 봤다면 좋았을 걸. 속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마음대로 마음을 따라가기보다는 내가 하면 좋을 거라고 여겨지는 일들을 하면서 살았다.


“엄마 비 오는 날은 우산을 들고 데리러 와주세요.” 마음을 말하기보다는 마음을 감출 '신문지 모자' 같은 것이 늘 필요했다.


며칠 전에 비가 왔고, 받아 둔 빗물에 머리를 감았다. 엄마는 빗물에 머리를 감으면 더 부드럽고 좋다고 했다. 빗물로 빨래를 했다. 내 머리와 몸은 비를 입고 있다. 특별하고 근사하게 느껴진다. 지금 햇볕에 머리를 말리고 있으니 햇볕까지 입은 셈이다.


샤워기를 틀면 빗속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것 같다. 물줄기들이 쏟아질 때 세기를 조절하며 온몸을 씻는다. 아니 맡긴다. 비가 강하게 내려 살갗을 때릴 때 닿으면서 튕겨나가는 쾌감이 있다.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바닷물 속에 잠겨 있는 듯하다.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샤워기와 욕조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 살 수 없음을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지 싶다. 자연을 몸으로 겪어가며 살고 싶은 욕망으로 고안된 사물. 또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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