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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마쓰모토 토시히코 지음 /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by 고라니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마쓰모토 토시히코 지음 /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인간은 왜 취하고 상처 내고 고립되는가


'명랑한 은둔자'의 캐럴라인 냅, '오늘 너무 슬픔'의 멀리사 브로더 등 알코올과 약물 등 중독된 이들의 이야기에 유독 관심이 갔다. 멀리사 브로더는 담배와 니코틴 껌, 술과 약물, 사람과 애정에 이르기까지 온갖 대상에 중독되는 성격이라 스스로를 "중독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도 앞으로의 읽기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문득, 내가 왜? 굳이 이들의 이야기를 챙겨 읽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질문을 품고 있던 와중에 마쓰모토 도시히코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을 만나게 되었다. 제목부터 이 책이다 싶은 느낌이 왔다.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25년간 약물 의존증과 자해, 자살에 대한 임상에 참여하며 만난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마음을 기댈 수 없어 약물에 의존하고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몸에 상처를 내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버티다 결국 사지로 몰리는 이들."


p27

처음에는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인 약물이 어느새 친구를 배신하면서까지 매달려야 하는 대상으로 변한다. 아니면 친구와 연결되기 위한 것이던 약물이 어느새 사람을 멀리하고 소란스러운 세상을 차단하여 고고한 세계에 홀로 틀어박히기 위한 것으로 변한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항상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다.


p28

"사람은 배신하지만, 약은 배신하지 않아."

나는 의존증 임상 현장에서 그런 말을 여러 환자에게 들었다. 그들은 안심하고 타인에게 의존할 수 없는 사람, 혹은 마음속에 덩그러니 뚫린 구멍을 '타인과 연결'되어 메우지 못하고 약이라는 '물건'으로 메우려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비뚤어지고 도전적인 표현이로라도 사람에 대한 절망을 사람에게 전하는 그 모순된 행위 자체가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


p40

의존증 전문병원에 부임하고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생각지 못한 돌파구가 열렸다.

내가 담당하는 환자가 어느 일요일에 열리는 약물 의존증 환자들의 자조 모임인 '익명의 약물 의존자들'

공개 미팅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한 것이다.


p42~44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어떤 소설보다도 인간적이고, 자학적인 유머가 가득했다.

(...)

"그래도 이렇게 이상한 자리에 묘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이상해서 사람이 회복된다고 할지... 아니, 농담은 그만두고, 진지하게 이야기할게요.

제 생각인데, 자조 모임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어요. 한 가지 효과는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의존증이라는 병은 '잊어버리는 병'이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우리 약물 의존자들은 수없이 약을 끊겠다고 맹세하고 실제로 수없이 끊어요. 뭐, 끊었다고 해도 며칠이나 몇 시간 그랬다는 말이지만요. (...) 약물을 그만두는 건 쉬워요. 계속 그만두는 게 어렵죠.


"자조 모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처럼 처음 모임에 찾아온 새로운 동료예요. 그 동료의 모습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모임에 방문한 예전의 자기 자신과 같아요. 그 동료 덕에 지금은 목구멍 너머로 깨끗이 사라진 기억, 마지막으로 약물을 썼을 때의 쓰디쓴 기억이 되살아나고 초심을 떠올리게 되죠. 즉, 이 모임에서는 과거의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자조 모임의 또 다른 효과는 미래의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의존증 환자가 좀처럼 약물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물이 당사자에게 중요한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오랫동안 약물과 함께 살다 보면 즐거운 기억에도 슬픈 기억에도 모두 약물이 포함되어 있어요. 나쁜 기억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약물 덕문에 일에서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고난을 극복하기도 하고, 대단한 만남을 경험하기도 해요.


그 때문에 의존증 환자에게 약물이란 마치 '가장 친한 친구'나 '끈끈한 친구' 같은 존재예요. 좀 있는 척 표현하면 '케미컬 프렌드'인 거죠. 그래서 약물 의존자에게 약물을 끊는 것은 일종의 상실 경험-오랫동안 함께 지낸 반려와 이별하는 것과도 비슷해요-이기도 해요.


그래서 약물을 그만두면 내게는 아무것도 안 남는 게 아닐까. 텅 빈 껍데기처럼 되어서 앞으로 계속 무미건조한 잿빛 같은 인생을 견뎌야 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많은 약물 의존자들이 좀처럼 약물을 끊지 못하는 건 아마 그 불안때문이겠죠.


그런데 자조 모임에 나오면 간신이 괴로운 날들을 견디고 1년 동안 끊은 사람, 3년을 그만두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사람, 나아가 10년, 20년을 끊어서 약물 없는 생활이 당연해진 사람과도 만날 수 있어요. 그 자리에는 가까운 미래의 내 모습, 먼 미래의 내 모습이 있어요. 결코 껍데기만 남지 않았고 고생스럽지만 나다운 인생을 즐기면서 몇 년에 걸쳐 약을 끊은 데 성공한 모습이 말이죠. 그런 미래상은 의존증이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회복하겠다는 의욕을 자극해줘요."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가혹한 상황에 빠지는 게 아니에요. 혼자 괴로워하는 거예요.


p64

약을 쓰면 시간의 흐름이 빨라져요. 그래서 밤마다 약 생각이 나요. 약을 하면 어느새 창밖이 밝아져서 '아아, 아침이다. 이제 괜찮아.'라고 생각해요. 그제야 겨우 깊이 잘 수 있어요."

그는 진료실에서 자주 그런 이야기를 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시간은 느리게 지나가지만, 각성제를 쓰면 신기하게도 시간이 빨리 흘러가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각성제를 몹시 원했던 것이다.


p67

약물 의존증의 본질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인식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약물 의존증 환자는 약물이 일으키는, 말 그대로 눈앞이 핑핑 도는 '쾌감'을 잊지 못해서 약물에 계속 손대는 것이 아니다. 그 약물이 나를 억눌러 왔던 '고통'을 일시적으로 없애주기 때문에 약물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 환자는 자해를 하는 이유를 다음처럼 설명했다.

"마음의 고통을 신체의 고통으로 바꾸는 거예요. 마음의 고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워요. 그런데 이렇게 팔에 상처를 내면 '아픈 건 여기야'라고 나 자신을 타이를 수 있어요.


68p

이 세상에는 살아가기 위해 고통이나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


70p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강하지 않음. 그런 불건강은 무언가 의존증이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얼핏 건강하게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듯한 사람들 중에도 사소한 불건강과 아픔으로 균형을 맞추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176p

약물 대책은 고통을 겪으며 고립된 '사람'의 존재를 무시한 채 오로지 약물이라는 '물건'의 관리 규제 박멸에 특화한 것이 되고 말았다.


177p

"안 돼, 절대로."가 약물 의존증 환자를 고립시키고, 회복을 방해하는 저주가 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기회를 잡을 때마다 거듭해서 이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 "안 돼. 절대로."는 절대로 안 된다.


202p

마트료시카, 아니면 마스크를 여러 장 겹쳐 쓴 복면 레슬러라고 비유하면 될까.

겉보기로는 약물 과다 복용이라는 '마음'의 문제인 줄 알았지만, 실은 뇌염이라는 뇌의 문제였다. 하지만 더욱더 깊은 곳에는 자신의 건강을 고의로 해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다른 '마음'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228p

"그 약 덕분에 살았어요."라며 효과를 자각할 수 있는 잘 듣는 약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 사람이 지닌 마음의 상처가 심각하면 할수록 극적인 효과를 안겨주는 약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251p

'쥐의 낙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명한 실험이 있다. 한 마리씩 철망 우리에 가둔 쥐(식민지의 쥐)와 넓고 쾌적한 곳에 동족과 함께 수용된 쥐 (낙원의 쥐) 양쪽에 평범한 물과 모르핀이 들어간 물을 모두 주는 실험을 했다.


실험의 결과는 실로 흥미로웠다. 식민지의 쥐가 모르핀이 들어간 물만 마시는 반면, 낙원의 쥐는 모르핀이 들어간 물에는 눈길도 안 주고 평범한 물을 마시면서 다른 쥐들과 장난을 치며 놀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완전히 모르핀 의존증이 된 식민지의 쥐를 이번에는 낙원의 쥐들이 있는 곳에 옮겨보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홀로 모르핀이 들어간 물을 마시던 식민지의 쥐가 이윽고 낙원의 쥐들과 교류하고 함께 놀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놀랍게도 낙원의 쥐를 흉내 내어 평범한 물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인 요한 하리는 TED 토크에서 "어딕션(의존증)의 반대말은 '맨정신'이 아니라 커넥션(연결)이라고 주장했다.


고립된 사람이야말로 의존증이 되기 쉽고, 의존증이 되면 점점 더 고립된다. 그래서 일단은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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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모토 도시히코

1967년생. 정신과 전문의. 1993년 사가의과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요코하마시립대학교 부속병원 정신과, 국립 정신 신경의료연구센터 정신보건 연구소 사법정신의학연구부, 같은 연구소 자살예방종합대책센터 등을 거쳐서 2015년부터 같은 연구소 약물의존연구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자해 행위의 이해와 지원> <나를 상처 입힐 수밖에 없어> <'죽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약물 의존증> 등이 있다. 제2회 정신과 치료학 우수논문상, 제17회 일본범죄학회 학술장려상, 제7회 일본 알코올 의존증 의학괴 야나기타도모지상 등을 수상했고,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으로 제70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했다.


의존증 전문의들도 약물 의존증 환자는 되도록 진료하지 않길 바라는데, 마스모토 도시히코는 약물 의존증 환자에 대한 저항감이나 기피감이 없었다. 그는 약물 의존증 환자의 어린 나이, 그리고 그로 인한 위태로움에 끌렸다고 한다.

의사가 환자들을 치료하는 사례를 풀어낸 책들은 끝까지 읽기가 힘들다.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를 따라가기에도 버거울뿐더러 내 상황과는 괴리가 있기 때문에 공감에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쉬이 지쳐버린다. 그런데, 이 책은 달랐다.

어딕션을 '중독'이 아닌 '의존증'이라고 번역했을 뿐인데 이런 질문이 바로 생겨났다. 그들은 왜,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을까.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약물 의존증 환자는 더 큰 '쾌감'을 욕망하기 때문에 약물을 끊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억눌린 '고통'에 대해서는 주목해 본 적이 없다.


'힘들게 하는 사람'은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나라가 약물 대책으로 취해야 하는 것은 법 규제를 늘려서 쓸데없이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약물이라는 '물건'에 빠질 수밖에 없는, 무언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야 말로 필요하다. (작가의 말_p259)


작가의 말이 참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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