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_배롱나무
이 나무는 이름을 부르려고 하면 장난기가 발동한다. 메롱 메롱. 핫핫핫 여름, 핫핑크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배롱나무 꽃은 꼬불꼬불한 왕라면 스낵을, 길게 뻗은 줄기에 어긋나게 달린 둥근 이파리는 회오리감자를 연상케 한다. 왕라면 스낵은 와그작와그작, 씹는 재미를 주던 과거로, (지금은 비슷한 류의 스낵들_왕소라, 고구마, 오란다_ 재미보다는 이 걱정이 앞선다), 회오리감자는 고속버스 휴게소로 싣고 간다. 떠나고 싶나.
어느 겨울, "저 나무는 홀딱 벗고 있네." 엄마가 우스개 소리를 하며 가리킨 나무가 배롱나무다. 배롱나무의 매끈한 수피를 보고 있으면 껍질이 퍼즐 조각처럼 벗겨지는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와 모과나무, 노각나무 수피가 차례로 떠오른다. 수피가 사로잡는 나무 목록이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처음엔 같은 나무를 놓고 배롱이다 백일홍이다 우기기도 했다. 백일홍. 꽃을 백일 동안 피운다 해서 붙여진 이름. 꽃이 한 번에 피고 지는 게 아니라 여러 날에 걸쳐 피고 져서 오랫동안 펴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나는 배롱나무의 어감이 재미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배롱배롱.
순천의 여름은 어딜 가든 배롱배롱이다. 짙초록 잎사귀 위핫핑크 꽃색이 대비되어 눈에 확 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맹렬하고 기세 좋게 여름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흰색이나 보라색 꽃의 배롱도 있으나 좀처럼 보기 힘들다. 우연히 어떤 집 담벼락 아래로 흰 꽃이 늘어져 있었다. 배롱을 보고 있는데도 배롱인가 싶었다.
배롱 잎은 둥글고, 잎맥도 선명하게 둥글어서 보고 있으면 어딘가 둥글어지는 느낌이 든다. 꽃은 입김만 세게 불어도 후둑후둑 떨어질 듯 얄랑얄랑 달렸는데 잎은 동백잎 마냥 딴딴하다. 걷기 힘들 만큼 강렬한 볕이 내리쬐는 길을 걷고 있을 때, 핫핑크 배롱을 마주치면 괜히 기운이 났다.
조례호수도서관 식물 그리기 수업을 하러 갈 때 늘 만나는 배롱 한 그루가 있었다. 가지가 낮게 길가 쪽으로 드리워져 꽃과 잎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9월까지는 꽃이 꽤 싱싱하게 피어있더니 10월 초가 되니 꽃은 거의 없고 열매가 달려있다. 비슷비슷한 크기로 둥글었던 잎 모양은 제각각 달라졌고 잎 크기도 작아졌다. 두께도 얇아진 듯하다. 찢어져 나간 잎도 여러 장 보인다. 한 여름 동안 붙들며 버텼던 힘을 훌 빼는 느낌이다. 여름을 지나, 나무 꼭대기 쪽 가지 끝에만 꽃을 달고 있는 배롱이 홀가분해 보인다.
여름은 여러모로 힘든 계절이다. 집에 에어컨이 없어서 축축, 눅눅했고 다른 곳에서는 에어컨이 너무 세서 손발이 시렸다. 갱년기에 다가가고 있어서인지 얼굴 전체에서 주체할 수 없이 땀이 솟는 희귀한 경험도 했다. 여름의 불편한 점만 지적하며 여름을 보내기는 어쩐지 여름에게 미안하다.
여름은 다른 계절과 달리 활동적인 에너지가 돈다. 저녁이면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여름이 내미는 손을 잡고 헉헉대며 바람을 일으킨다. 여름은 몸을 움직이게끔 자꾸 부추긴다. 내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는 새벽 운동도 여러 날 했다. 여름의 힘이다. 의지할 수 있는 여름의 구석을 발견해서 있어서일까. 나이 먹을수록 여름이 아주 조금씩 좋아진다. 여름이 더 뜨거워지게 않게 뭐라도 하고 싶다. 궁리한다.
"배롱나무는 나락 익을 때까지 꽃이 세 번 피어."
엄마는 배롱나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세어 본 사람처럼 말한다. 세 번 피는 꽃. 다음, 그다음, 그 그다음이 있다는 게 희망처럼 다가온다. 여름에는 무더위, 장마, 늦더위. 세 번의 고비가 있다. 올 추석은 늦더위가 몹시 기승을 부렸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손빨래, 찬물샤워, 저녁 달리기를 했다. 축축 늘어지지 않게 몸을 움직이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그때 내가 배롱나무였다면 적어도 한 번은 꽃을 피웠을 테다.
여름의 고비를 잘 넘기면 선선한 공기, 바람, 하늘이 선물처럼 온다. 요즘이 딱 그렇다. 여름 다음에는 가을이 온다. (가을 다음 겨울은 좀 보류한다) 조금은 웅크리고 싶은 날들이지만 하늘과 구름이 멋져서 살갗에 닿는 바람이 시원해서 걷게 된다.
엇! 도서관 앞 목련이 꽃을 피웠다. 선암사에는 겹벚꽃이 피었다. 눈을 의심했다. 봄꽃이 가을에도 피다니... 무슨 일일까. 계절이 뒤엉킨다. 이상기후로 때가 혼동되는 걸까. 꽃들은 제 식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우리 몫이다. 과거에는 계절이 있었단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지도.
자연의 각 단계는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선명하거나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찾아보면 발견할 수 있으나 우리의 주의를 끌어당기지는 않는다.
혼자 있을 때의 장점을 누리게 해 주면서도
조용히 공감해 주는 길동무 같다.
우리는 그와 함께 있으면 걷고 말하고 침묵할 수 있으며,
낯선 곳에서 긴장할 때도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1858년 11월 8일의 일기
[매일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니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