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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Oct 26. 2024

241024_식물 안 그리는 목요일

  왕조 1동 행정복지센터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지난주보다 훨씬 붉고 진하게 물들어가는 화살나무. 색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멋지다. 멋져." 혼잣말이 나와버렸다. 이럴 때 정말이지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그래도 감탄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오와. 우아. 와아....   


  조례호수도서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풋, 웃음이 터졌다. '쌈지 언니들의 이야기 숲' 입간판이  보였다. 입간판에 그려진 다양한 식물 중 내 사랑 고마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3층을 향해 한 계단 한 계단 내딛는 발걸음이 가분했다. 한여름, 그릴 식물을 찾아 쌈지 숲을 그림 친구들과 땀 흘리며 돌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따라왔다.


  전시된 그림을 보는데 고마움들이 파도처럼 마구 밀려왔다. 와... 고생스러우셨겠다. 보테니컬 아트 수업을 기획. 진행해 주셨던 사서님과 관장님, 강사샘들의 노고가 제일 먼저 느껴졌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번 여름의 귀하고 애틋한 시간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 한 점 한 점 액자에 넣고, 간격을 조절해 배치하고 걸기까지. 행정 업무와 현장을 오가며 얼마나 수고스러우셨을까.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수저만 들었을 뿐'이라는 어떤 배우의 수상 소감이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우리는 어쩌면 어린이였다. 좋은 어른들의 지지와 응원 아래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펼쳤다.


  3층 텅 비어있던 벽면과 카페테리아에 쌈지 언니들 그림으로 채워졌다. 그림의 분위기에 맞게 액자색이 달라서 다채로움이 느껴졌다. 액자에 담겨 걸린 그림을 보니 종이 낱장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내가 그린 고마리와 나무수국이 나의 들뜸을 이해한다는 듯 끄덕끄덕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다들, 멋지다! (물론 나도) 크크크.


  자신만의 고유한 식물 그림과 글이 모여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진 숲을 그려냈구나. 모두 얼굴이 밝았다. 내 마음이 밝아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들떴다. 기뻤다.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나는 출판 기념회의 자리에서 "기자는 언제 오나요?" 너스레를 떨었고 자꾸 까불어댔다. 꽤 오래전에 사라졌던 까붊이 되살아 났다. 마흔 중반이 얼라처럼 까불까불 댔다.  


  샌드위치와 과일. 간식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 배려. 뭉클. 도서관 종이가방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책 '쌈지 언니들의 이야기 숲'이 들어있었다. 읽기에 부담 없는 두께다. 재미있겠다. 그림은 보았지만, 쌈지 언니들의 글은 처음이다.


  11시가 되자, 돌아가면서 그간의 시간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다. 백 퍼센트 출석을 한 두 명은 박수를 받았다. 흠흠. 두 명 중 한 명이 나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육아 혹은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의지와 상관없이 빠질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 내게는 별 다른 이슈가 없었다.


  내 순서가 되자 이 말 저 말 두서 없이 막 터져 나왔다. "어? 어디 안 적혀있는데..." 옆에 앉은 쌈지 언니는 우스개 소리를 던졌다. 사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내 사랑 고마리 예찬론과 고립되었던 나를 밖으로 꺼내 준 수업에 대한 고마움이 골자였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과 많이 달라졌구나. 내게는 쓰고 그린 정식 출간되지 않은 소장용 책 몇 권이 있다. 그때는 책이 나온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부족함이 많다는 것, 판매되지 않는 것, 내가 아는 몇몇 사람만 볼 수 있다는 것. 늘 결과물이 탐탁지 않았다.


  '쌈지 언니들의 이야기 숲'은 비매품이고 나만의 책도 전시도 아니다. 곰곰 생각해 보니, '함께'여서 이렇게 좋은 것이다. 식물들도 자신은 오롯하게 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 '쌈지 언니들의 이야기 숲' 전시와 책도 마찬가지로 자신은 오롯하게 또 함께다. 식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전시와 책에 담겨있다.


고유하게 함께. 를 몸소 겪었다.


  어떤 쌈지 언니의 글이 꾸밈없고 참 좋았다. 그녀의 글에는 식물을 만난 순간의 감각이 살아 있었었고 그리면서 식물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마음도 전달되었다. 식물에게 묻고, 먼 데서 식물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리고 싶은 식물을 발견하면 어떤 부분을 그리면 좋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처음엔 그러지 않았다. 식물 하나하나 오래 바라보았는데, 지금은 머리를 굴린다. 여기를 그릴까. 저기를 그릴까. 어디를 어떻게 그려야 구도가 잡힐까. 그리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글은 '처음 마음'을 되돌아보게 했다. 그리는 시간보다 식물을 찾아 서성이는 시간이 길었던 처음으로. 이제 정말, 함께였던 수업은 마무리 되었다. 식물을 계속 그리고 쓰고 싶은 마음이 지펴져서 다행이다. 또 다른 시작이 시작되었다.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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