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인 것, 야마나카 히사시 장편동화, 고바야시 요시 그림/ 햇살과 나무꾼 옮김 / 사계절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내가 나인 것.
무엇일까.
믿고 보는 햇살과나무꾼의 옮김. '한밤중 톰의 정원'도 햇살과 나무꾼. 언제 한 번 햇살과 나무꾼, 논장 책들은 날 잡아서 한 권 한 권 파고들고 싶다.
69년에 출간된 책이라고? 제일 먼저 작가의 늙지 않은 문체에 감복했다.
황톳빛 누런 표지. 누구랑 대판 싸우고 흙바닥을 뒹굴었나. 지치고 핼쑥한 모습의 남자아이. 반항기 가득한 눈 속에 어렴풋한 체념도 보인다. 좀 더 바라보면 아이에게 가련한 마음이 생긴다. 아이는 좁은 어깨를 툭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심스레 묻고 싶어진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아이는 겨우 앉아 있을까. 그래도 살아있는 눈빛. 앙다문 입술이 이 소년을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는 것 같다. 소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을 살짝 벌린 채 보으고 있다. 마치 기도 직전에 마음을 추스르려는 동작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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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p 히데카츠는 남들 마음대로 안 되는 자유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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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뛰어나다,는 뜻을 가진 이름. '히라타 히데카즈'는 가족(엄마, 동생)이 싫고 집이 싫다. '지진으로 집이 폭삭 내려앉았으면...' 일 년 내내 집에 돌아가기 싫은 히데카즈. 수업시간에 딴짓하지. 공부 못하지. 실수투성이지. 엄마는 히데카즈에게 매일 잔소리와 꾸지람을 늘어놓고 들들 볶는다. 반면 다른 형제(대학생 요시카즈, 형 고등학생 마사카즈, 누나 도시미, 동생 마유미)들은 모범생.
'혹시 나, 야단맞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야단맞기 위해서 태어난 건 아닐까?'
작가는 재치 넘치는 문장을 구사한다. 히데카즈 눈에는 엄마가 잔소리를 몹시 사랑하는 듯 보였다. (...) 히데카즈는 잔소리를 더없이 사랑하는 엄마가 잔소리를 할 수 있게 해 주니까 효자인 셈이다.
무시무시한 여름방학. 엄마의 감시 아래 방학숙제며 쌓여 있는 문제집을 풀던 어느 날,
"아무튼 너란 애는 뭘 시켜도 변변히 하는 게 없구나. 노력해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해 줘 봐."
그게 소원이면 깜짝 놀라게 해 주겠어. 히데카즈는 홧김에 가출을 한다.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연습장이나 문제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통을 틔우고 싶었다."
히데카즈는 엄마가 자기 말을 좀 들어주고 엄마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자신 그대로를 봐 주면 좋겠다.
엄마의 엄포에 맞대응하며 가출한 히데카즈는 엄청난 뺑소니 사건을 목격하고, 우연히 발견한 초가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또래 나츠요와 할아버지를 만나 열흘 정도 함께 지낸다. 자신과 나이는 같지만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스스로 공부하고, 음식도 만들고, 타인을 보살필 줄도 아는 나츠요를 보면서 히데카즈는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히데카즈는 맹장염으로 입원한 나츠요 곁을 지키며 스스로를 미더운 존재로 여긴다. 나츠요는 엄마를 찾고 싶지만 할아버지는 나츠요를 위한 일이라며 진실을 감춘다. 나츠요를 위해서 할아버지와 맞짱 뜨는 히데카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하고 나츠요를 맡으셨죠? 엄마 얘기도 비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그러셨고요?"
"그, 그야 그렇지."
"그러니까 그걸로 된 거예요."
"마찬가지로 나츠요가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이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일로 나츠요가 난처해지거나 불행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다고?"
"네, 어쩔 수 없어요. 나츠요랑 할아버지는 같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옛날 경험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만, 나츠요한테는 앞으로 경험할 일들이 있으니까 옛날이 아니라 앞으로가 문제인걸요."
집을 떠나 만난 다른 환경에서 히데카즈는 스스로 책임지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생각과 마음, 입장을 단호하게 말한다. 나츠요 곁에서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느낀다. 나츠요를 대신해 할아버지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나츠요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도 말한다.
나츠요 집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의 실수로 불이 났고 집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정신을 잃은 엄마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히데카즈는 자신이 가보겠다고 나선다.
히데카즈의 결연한 마음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엄마는 내 얼굴 따위 보기 싫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이 얼굴을 보여 주겠어. 엄마는 나를 때릴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을 거야. 누가 뭐래도 나는 엄마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겠어. 그리고 나는 나라는 것도 알려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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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인 것,
무엇일까.
어쩌면 타인, 다른 세상과 만나 나를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집과 비슷하지 않을까. 계속해서 서로를 초대하면서.
한밤중 톰의 정원, 톰이 동생 피터에게 보내는 편지도 그렇고, 내가 나인 것, 나츠요와 히데카즈의 편지도 그렇고 .
오래 전에 출간 된 책을 읽다보면, 서로간의 긴밀한 (비밀 공유) 소식을 전하는데 '편지'가 엄청난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게 반갑다.
나 데리고 산지 50년이 다 되어가는데 살면 살수록 더 모르겠다. 이제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빠한테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아파 누워 있는 엄마 보고도 야멸차게 도망가고 싶다. 하찮은 마음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편지를 쓰면 솔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