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Jan 26. 2024

당신은 밖에 나가는 일이 쉽나요

-검은물잠자리 

당신은 밖에 나가는 일이 쉽나요? 


  하루에 한 번은 별 일 없이도 밖에 나가려고 일거리를 만들어요. 밖에 나가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떤 장면을 보게 되거든요. 그게 즐거워요. 정말 의욕이 생기지 않는 날에는 집 근처 카페에 가요. 초록색 의자를 보면 없던 의욕이 조금 생기곤 해서, 그 의자를 믿고 가방 안에 책이나, 노트북을 챙겨서 나가봐요. 오늘은 사라를 보았어요. 

  

  아이의 이름은 사라였어요. 분홍 원피스를 입고 길고 보드라운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듯 사뿐사뿐 걷는 여자아이. 카페의 너른 공간을 누비며 탐험하듯 쪼그렸다가 가짜 나무의 나뭇잎, 선인장의 가시를 만져보았죠. 사라야! 사라야. 사라야. 아빠는 사라 뒤를 쫓아다니며 이름을 불렀어요. 아이는 아빠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계속 멈춤 없이 돌아다녔어요.  생기 충만한 아이는 언제나 인사하고 싶게 만들어요. 


  저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어요. 자꾸만 뒤를 따라다니게 되는 친구. 오늘은 그 친구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검은물잠자리 


  새벽 3시경 잠이 깼다. 오랜 경험상 다시 잠들기 틀렸음을 안다. 어제의 장면들을 두서없이 오가면서 늘어놓았다. 처음엔 인지하지 못했는데,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같은 장면을 돌려보고 있다는 것을. 날개를 접은 검은물잠자리. 


옥룡사지 갈래요? 

어. 


  대뜸 묻는 너에게 나는 바로 답했다. 차 안에서 옥룡사지라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괜히 끌리던 곳이었다. 옥빛 절과 연못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너는 절터만 남아있다고 했다. 머릿속에는 폐허와 연못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옥룡사지를 향해 오르던 길에는 빼곡하게 제멋대로 자란 동백나무 숲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다.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동백나무가 일률적으로 쭉 늘어선, 구획되고 정돈된 동백나무 숲을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 아주 깊고 먼 곳까지 동백나무가 살고 있었다.  


  붉은 꽃들이 피어있다면... 황홀했겠다. 이곳의 동백꽃 핀 풍경은 내 상상을 능가할 것이 분명했다. 나의 미천한 상상력으로 겨우 겨우 붉은 동백이 만발한 풍경에 이르려 하면, 너는 뱀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확 깼다. 나는 뱀이 나오면 사람도 놀라지만, 뱀도 놀란다고. 말하며 뱀 이야기에 응수했다. 너는 "맞아. 맞아. 뱀은 손이 없어서 눈을 가리고 숨을 수도 없어. 얼마나 무서울까."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또 너의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 있지도 않은 뱀의 손을 상상 (개구리발처럼 물갈퀴가 있는 손_도마뱀) 아니 도마뱀을 떠올리며 사람과 맞닿뜨린 도마뱀이 깜짝 놀라 눈을 가리는 장면이 훅. 에이, 망했다. 동백꽃 핀 숲은 상상하지 말고, 내년에 와서 보자. 마음먹었다.   


  혼자, 답답할 때 왔어요. 확 트여서 좋았어요. 

 

  옥룡사지 터는 폐허라기보다, 풀밭에 가까웠다. 절이 불타고 난 뒤의 잔재들을 봉긋하게 쌓아 남겨두었다. 그곳에도 풀이 멋대로 자라 오랫동안 잊힌 무덤처럼 보였다. 무덤처럼 남은 흔적,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줍고 싶은 생각조차 안 드는 돌과 부서진 기왓장들이 놓여있었다. 

  잠자리가 많았다. 잠자리들은 여름의 환영인사를 건네며 내 머리 위에 가까운 곳에서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잠자리가 많다. 어! 실잠자리도 있어."라고 호들 갑스레 말하는데, "실잠자리 있죠." 너는 별 반응이 없었다. 너는 이미 잠자리를 많이 보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확 트였다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시야를 가리는 큰 나무들과 가까이 있는 듯한 산 능선들. 이 정도가 확 트였다고? 나는 시야에 걸리는 것 없는 광활한 트임을 상상했다. 반면, 여기는 야트막한 언덕을 올랐을 정도의 트임. 오히려 나에게는 트였다기보다 막혔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트인 건가. 너에게는 이 만큼의 트임도 트였다 느낄 만큼 마음이 많이 답답하고 절실했던 걸까. 


  갑자기 너는 풀숲을 헤치고 걷기 시작했어. 뱀 나올까 무서워하던 너는 없고, 아주 용감하고 씩씩한 기운찬 걸음으로 쓱쓱 나아갔어.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나에게서 멀어졌지. 돌발행동. 내 곁에서 풍경을 바라보다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며 내려가겠다 예상했는데... 당황스러웠어. 나는 너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그 자리에 서서 네가 움직이는 방향을 눈으로만 따라갔어. 너 뒤를 따라 걸어야 하나 할 발 떼려다 신발이 젖는 게 싫어서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었지. 너는 절터를 가로질러 반원을 그리듯 돌아 나왔어. 검은 티셔츠를 입은 네가 연두의 풀밭에서 도드라져 보였어. 나는 셔터를 눌렀어. 


  혼자 이곳에 왔을 때도 너는 지금처럼 그렇게 가로질러 걸었을까.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만약 절이 있었다면 너는 절을 통과한 셈. 그런 너의 걸음걸이는 처음 보았고 그 걸음에는 너만 있었어. 너와 함께 이곳에 온 나도 없었고, 너의 남편, 아이들도 없었지. 그냥 너. 그저 너였어. 


  마음이 자꾸만 그 장면에 멈추었어. 너는 그날 뱀 타령을 했다면 나는 잠자리 타령을 했지. 옥룡사지를 나와 솔밭섬으로 이동해 걷는데 네가 여기 좀 보라고 가리켰던 것 같아. (벌써 기억이 희미해) 관목 위에 수십 마리의 검정 물잠자리가 날개를 접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앉아있었지. 우리가 지나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어. 수많은 검정은 하나의 검정처럼 보이기도 했어. 낮잠을 자나. 나는 신기해하는데 너는 여기도 저기도 물잠자리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어. 맞아, 너와 나는 꿩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걷고 있었지. 너는 그곳에서 꿩을 보았는데 너무 아름다웠다며... 감탄하며 말했었지. 대숲 근처에서 본 꿩은 결국 못 봤어. 


  검은물잠자리가 자꾸 생각났어.

  

    어린 시절 물길을 조심조심 가르며 잡으러 다녔던 검은물잠자리. 그때는 어려서였을까. 물잠자리가 훨씬 컸던 것 같아. 우아한 몸놀림. 검고 푸른빛이 감도는 꼬리. 잡고 싶었다기보다 보고 싶었던 거 같아. 어떤 신비. 잠자리 채를 휘두르긴 했지만 속으로는 잡히지 않길 바랐어. 물길을 따라 검은물잠자리 뒤를 계속 따라다니고 싶은 마음.  

  어제의 너는 나에게 검은 물잠자리였어. 나는 검은물잠자리가 풀어놓는 풍경을 따라 걷고 있었어. 저건 무슨 나무예요. 저기 저건 무슨 꽃이에요. 어쩜 그리 모르는 것만 쏙쏙 골라 묻는지. 나는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어. 네가 "저건 아카시아 나무인가 봐요." 했을 때, 나뭇잎 모양이 아카시아 아닌데라고만 했지. 무슨 나무인지는 몰랐어. 저 열매 달린 나무는 뭐예요. 어, 저건 본 적도 있고 엄마한테도 물은 적 있어서 알았는데... 개... 개.... 개.... '개' 소리만 내고 있는데 그 사이 검색을 해 본 너는 "옻나무네요."라고 말했지. 나는 '개옻나무' 맞아. 그제야 '개'소리를 멈췄어.  


  나무옹이에서 싹을 틔운 연둣빛 새싹. "언니 사진 잘 찍으니까 찍어봐요." 나 혼자 걸었다면 보지 못했을, 만약 보았다면 나 역시 사진에 담았을 생명이 초롬 하게 빛나고 있더라. 또 한 번 너와 걷는다면... 검은물잠자리를 볼 수 있을까.   

 

  처음으로 네가 무엇과 동일시되어 느껴졌고, 그건 아마도 내가 새벽에 잠에서 깼고, 계속해서 어제의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일 거야. 잠에서 깨지 않았다면, 글을 쓰지도 않았겠지. 넌 분명 잠에서 깨지도 않았을 거고, 어제 나와 있던 장면도 떠올리지 않았을 거야. 


  내가 네 뒤에 있는 게 좋아. 경사 경, 나뭇잎 엽. 참 예쁜 이름이야. 오래오래 다정하게 부르고 싶어. 나뭇잎 엽서 쓰는 마음으로 기쁘게~



  사라는 가짜 선인장에 자꾸 손을 대요. 낯선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뿐인데도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기록해 두어요.  사라. 사라. 아빠처럼 아이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따라 불러봐요. 갑자기 사라의 동생이 넘어졌는지 울음을 터뜨려요. "아빠, 아빠" 목 놓아 부르고 엄마가 달려와 아이를 안아 올리며 "사샤 사샤." 달래요. 사라의 동생 이름은 이름은 사샤. 사라와 사샤. 집에만 있었다면 들을 수 없는 이름이죠. 또 보게 된다면 "안녕 사라. 사샤" 반갑게 인사하게 될지도 몰라요. 


  오늘 제가 본 바깥 풍경은 이랬어요. 당신의 바깥 풍경도 궁금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