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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an 31. 2024

기억에 남는
타인의 방문을 들려주세요

-미루나무의 방문 

 3년 전 여름, 급작스럽게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친구가 병원 앞에 짠 하고 나타났어요. 코로나로 인해 병원 출입이 되지 않아서 빵집 앞 테이블에서 잠깐 친구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친구의 방문 이후, 저는 다르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타인의 방문이 당신을 달라지게 만든 경험이 궁금해요. 어떤 날씨였는지, 장소였는지. 누구였는지. 그의 방문으로 인해 당신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도요.    



  

  h가 방문했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잠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전화가 왔다. 병원 입구에 있으니 잠깐 내려와 보라고. 입원실에서 병원입구까지는 늘 미로 같았는데 이번에는 헤매지 않았다. 느낌이 좋다.   

 

  모자로도 마스크로도 감춰지지 않는 건강한 빛, 반바지에 연한 분홍색 린넨 셔츠. 보기만 해도 시원한 차림이었다. 발목이 굵어서 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는 h였는데 변화가 놀라웠다. 부기 빠진 탄탄한 다리. 온몸에서 빛이 고르게 발산했다. 


  h를 보는데 후텁지근한 여름밤의 습기 속에서 청량한 바람을 만들어내는 미루나무가 연상되었다. 언제 왔는지. 쭉쭉 뻗은 미루나무와 어울리는 흰 구름도 곁에 있었다. 미루나무는 내게 에그 타르트를 건넸다. “내일 엄마 약 먹고 나면, 이거 주면 되겠다. 고마워.” 말하는데 침이 다 고였다. 


  나는 미루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제야 나는 내게서 병약한 기운이 나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병실에만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한 감각이었다. 혹시라도 그 기운을 미루나무가 눈치챌까 여름 날씨만 붙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 중에도 지나가고 있는 여름인데도 말이다. 여름 타령을 끝내기라도 한다면 우울하고 불안한 심정을 h에게 마구 토로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줄곧 h에게 나는 그래왔다. 건강한 기운을 뿜어내는 h에게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인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소연을 하지 않는 게 h의 방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7월 말에서 8월 중순까지 병실에만 있어서 여름 바깥공기를 느낄 새도 없었다.     

   “좋아 보여.”  

   “하루에 2만 보 걸은 지 세 달 넘었어. 2만 보를 한 번에 다 걷는 건 아니고 나눠서. 비 오면 집에서 매트 깔고 2만 보를 채우지. 처음엔 엄지발톱에 멍도 들고 발목도 불편하고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다리가 무겁다가도 걷다 보면 가벼워져. 걷기만 꾸준히 해도 자세가 발라지고 복부에 힘이 생기더라. 복근도 생겼다니까. 이제 예전 몸무게로 돌아갔어. 그동안 못 입었던 옷도 다시 입고.” 

  

  미루나무의 복근이 보이는 듯했다. 미루나무는 응원과 격려의 신이다. 나뭇잎을 찰랑찰랑 흔들며 시원한 바람과 건강한 에너지를 품고 내게 왔고, 나눠주기까지 했다. 여름밤의 습기와 더위로 지친 표정이 역력한 사람들 틈에 한 그루 나무로 오롯하게 존재할 수 있는 h. 나는 나무를 보듯 h를 우러러보았다. 


  h의 방문 이후 간이침대에 눕는 대신, 잠깐씩 나가 바깥공기도 쐬고, 골목골목 걸어 다니거나 강변을 쭉 걷다 오기도 했다. 덥고 습한 공기에 땀도 났지만 미루나무도 걷고 있겠지? 생각하면 미루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좋아서 자꾸 걷게 되었다. 


  타인에게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걸어왔다. 걸으면 몸과 마음이 좋아지는 걸 알고 있다. 타인에게 걷는다고 말하는 게 좋았다. 걷기조차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의식해서였다니 어쩌다 그리 된 건지 안쓰럽다. 내게는 늘 타인이 따라다녔다. 그 타인은 나를 보는 제2, 제3의 나이기도 했다. 이전과는 다른 걷기가 h의 방문 이후 시작되었다. 


  나는 주 5회 하루 7 천보 정도 5개월 꾸준히 걷고 있다. 대단하지 않은 수치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멋진 몸을 만들겠다는 욕심도 없다. 그저 회복하고 싶다. 어린 시절 민첩하고, 거리낌 없이 모험하던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 걷기가 회복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방문은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와야 할 수 있다. 걷기도 그렇다. 어떤 방문은 상대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걷기도 그렇다. h의 방문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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