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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Feb 26. 2024

당신에게 시작을
의미하는 물건이 있나요?

파래무침과 노트북 

  당신에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 물건이 있나요? 시작이 점점 어려워져요. 시작을 에너지 낭비처럼 여기고는 생각으로만 그쳐버려요. 올해 피아노와 수영 배우고 싶다 했는데 마음뿐이지,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네요. 경험상 시작해야 새로운 친구와 생기가 생긴다는 걸 아는데 주춤주춤. 

  그래도 브런치에 글은 성실히 쓰고 있습니다. 작년에 저에게 중고 노트북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주춤대고 있는 어떤 시작, 혹은 훅 해버린 시작이 있나요?    


  작년 이 맘 때의 일이다. 막내이모가 집에  놀러 왔다. 내가 저녁으로 준비한 파래무침과 파래 계란말이를 맛있게 드셨다. 이모의 젓가락은 계속 파래무침을 향해 돌진. 그 모습을 보는데 거의 최초로 음식을 만들고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후 내가 만든 파래무침 솜씨는 큰 이모, 울산이모에게까지 퍼졌다. 앞집에 사는 큰 이모는 파래를 사놓고 나를 불러 어떻게 무쳐야 하는지 물었다. 얼떨떨한 경험이었다. 양념은 식초와 멸치액젓, 설탕 조금이 다였는데... 

  

  며칠 전 아빠 병문안을 갔다가 도서관 가는 길에 막내이모의 전화를 받았다. 역시 이야기의 시작은 파래였다. 본인도 파래를 사다가 무쳤는데... 그 맛이 안 나더라며. 파래철이 이미 지났다고 했다. 날씨가 따듯해지니 파래 자체가 맛이 없다 했다. 막내이모가 전화를 건 이유는 "밥 먹자"였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본인 집으로 오라 했다. 엄마가 구운 고기를 안 먹어서 나도 언제 먹어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했더니 막내이모는 센스 있게 수육과 삼겹살 구이 두 가지를 해주셨다. 기름 좔좔, 쫀독한 삼겹살을 맛나게 먹고 믹스커피까지 한 잔 했다. 


  막내이모는 손이 재빨랐다. 먹자마자 바로 설거지를 했고, 물을 팔팔 끓여 식기류를 소독했다. 설거지하는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그릇이며 프라이팬을 정리하는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뭐 하나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막내이모는 내가 말을 거는 것도 모르고 본인 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이모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모와 우리는 분명 같은 공간에 있지만 외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모 본인에게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이명이 생긴 이후로, 막내이모와 부쩍 가까워졌다. 막내이모는 십 년 이상 이명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막내 이모는 10년 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극심한 어지럼증과 구토로 응급실에 갔다고 한다. 그 후 왼쪽 귀는 청력을 상실했고, 오른쪽 귀는 쉭쉭 바람소리 같은 이명이 들린다고 했다. 이모의 이명은 고정적인 소리인 반면, 나의 이명은 수시로 소리 종류와 강도가 바뀐다. 양쪽 귀에서 각기 다른 소리가 나고 풀벌레, 삐이- 기계음, 부왕부왕 대는 벌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린다. 막내이모와 나는 전에는 데면데면했었는데 이명을 공유하는 사이로 거듭났다. 


  막내 이모는 안문숙이 오래전에 썼던 책 이야기를 꺼냈고, 읽고 싶은데 이미 절판된 책이라 10만을 줘야 살 수 있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서관에 검색해 보니, 연향도서관에만 무려 두 권이나 있었다. 나는 책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야 하는데 안문숙 책을 빌려다 주기로 했다. 막내 이모 집에서 나와 도서관을 향해 걷는데 분홍동백, 홍매화가 어찌나 예쁘게 반짝이던지. 발걸음까지 사뿐사뿐해졌다. 


  막내이모에게 안문숙 책을 건네는데 두툼하고 하얀 노트북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본인 쓰라고 아들내미가 줬는데 쓸 일이 없다며,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했다. 흰색이 어떤 암시처럼 다가왔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 순간 이 노트북이 나에게 오게 된 필연성 같은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고 데려가야겠다는 마음이 훅 들었다. 


  "이모 나 쓸래!"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고자 첫 글을 쓰는 동안 별 고민 없이 노트북 이름도 붙였다. '블랑' 프랑스어로 흰색. 지금까지 썼던 노트북은 검정이다. 그 아이에게는 '누아'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둘은 함께 갈 것이다. 목련 꽃잎 그림자처럼. 서로 연결되어 써 나갈 것이다.  


  첫 번째 노트북은 어린이 뮤지컬 '신호등 요정과 마법 사거리'를 쓰기 위해 대건 선배님이 중고로 급하게 구해준 것이었다. 두 번째 노트북은 남산에서 일할 때 정아 님이 선물해 주셨다. 지금껏 내가 돈 주고 노트북을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누아가 너무 느려지고 배터리도 금세 닳아서 쓰기 힘들었는데, 때마침 블랑이 왔다.  


  섣부르지만, 네 번째 노트북은 누구에게서 올까. 히힛.  


(202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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