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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Feb 28. 2024

뜻밖의 선물이 궁금해요

빠씨와 모나미 

    자주 쓰는 분홍색 모나미 153 볼펜이 있다. 무게감도 있고, 필기감도 부드럽고 매끄럽다. 아무리 오래 써도 똥이 안 나온다. 한 글자만 써도 똥 묻어 나오던 옛날 모나미가 아니다. 분홍 모나미는 빠씨에게 받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빠씨는 혜혜언니의 두 살 위 오빠다. 언니는 오빠를 빠씨라고 부른다. '빠씨' 조금 경박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입에 촥촥 붙어 나도 언니처럼 '빠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빠씨가 없는 자리에서만.    


   작년 가을, 혜혜언니 집에 1박 2일로 놀러를 갔었다. 순천에서 서울까지 혜혜언니 차로 이동을 했다. 4시간 이상 걸리는 여정이었지만, '이상형 월드컵', 영화, 책 이야기 등을 나누며 가니 순간이동을 한 듯 서울에 도착했다. 언니네 집은 건대입구 역에서 가까웠다.   


  대학 때 언니의 아지트였던 '겨울 나그네'라는 술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번쩍번쩍 번화한 거리에 시간이 멈춘 듯한 초록 간판과 흘려 쓴 서체가 촌스럽고 정감 갔다. 문을 열자마자 꼬릿꼬릿한 냄새가 훅 들어와서 숨을 쉬기 힘들었다. 솔직히 바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의 추억의 장소이니 참아볼 만할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1,2 층으로 나누어진 실내는 탁 트이고 넓었다. 자리가 독립된 공간으로 되어 있어서 은밀한 데이트를 하기에 딱이었다. 언니가 대학 때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풋풋한 시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언니 얼굴은 상기돼 보였다. 얄풋 바삭한 돈가스와 상큼한 레모네이드. 함께 먹으니 맛이 좋았다. 벽에는 온갖 낙서로 빽빽했고 테이블은 끈끈했다. 돈가스와 레모네이드는 또 먹고 싶을 만큼 맛이 좋았다.    


  언니네 집에서 둘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귤을 까먹으며 시시덕대며 이병헌 감독 영화 바람 바람 바람을 보았다. 9시가 넘자 빠씨와 언니네 엄마가 함께 들어왔다. 두 분 다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언니 엄마는 친목모임에서 막걸리를, 빠씨는 회식을 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이들인데도, 낯섦이 없었다. 되려 친근했다. 선물로 들고 온 컨츄리 스윗 와인과 동백 에센스 스틱을 어머니께, 각종 과자들과 에센스 스틱을 빠씨에게 건넸다. 빠씨는 종이가방 안에 든 과자들을 보더니 황당해하며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유발 선물 작전 성공이다. 

  

  언니 엄마는 나에게 인상이 참 좋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는 조용히 있다가 대뜸 말했다.      

  “미인이세요.”  

  “푸하하하하.”


  그의 진지한 표정에 큰 웃음이 빵 터져 나왔다. 취한 게 분명하다. 헐렁한 몸빼차림, 맥주 몇 잔을 마셔 풀어진 동공과 벌게진 얼굴이 미인일리 없다. 언니에게 들은 빠씨. 소심하고 고지식한 내성적인 그의 성격상 대놓고 '미인'이라고 말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내게 예의상 한 말이고, 예의상 비슷한 말이 돌아오기를 기대한 걸까. “미남이세요.” 같은. 아무튼 '미인'은 오래된 듯한 신선한 말이었다.    

   

  이틑 날, 저녁은 언니와 나 빠씨가 함께 했다. 

  “저도 빠씨라고 불러도 되나요?” 

  “안 돼요. 정들어요.”

  예상을 빗나가는 대화가 즐거웠다. 그는 양념갈비가 타지 않게 열심히 구우면서 무슨 과였는지? '시시시작'이 첫 번째 그림책인지? 내게 질문을 했다. 내가 말할 때는 고기도 뒤집지 않고 집중해서 잘 들어주었다. 


  놀려 먹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해 “오늘도 미인인가요?” 농담을 던졌는데 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네. 미인이고 예쁘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쯤이면 오히려 그가 나를 놀려먹는 건가. 그의 대답에 나는 또 웃고 말았다.   


  “줄 게 이거밖에 없네요.”

  텔레비전을 보며 쉬고 있는데 그가 말을 건다. 그림 에세이 두 권과 모나미 볼펜이다. 

  “문구류를 좋아해서 샀는데 분홍색인지 몰랐어요. 내가 쓰기에는 좀 그래서요.”

  “고맙습니다. 오! 부드럽게 잘 나와요.”

  

  언니는 빠씨가 자기 친구에게 한 번도 선물한 적이 없는데 의외라고 했다. 내가 선물한 과자와 화장품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씨가 선물한 볼펜을 내가  신나게 쓰는 것처럼 그도 과자도 맛있게 먹고 동백 에센스 스틱도 잘 바르고 다녔다면 좋겠다. 문구류를 좋아하는 빠씨. 목폴라 좋아하는 빠씨. 나를 미인이라 불러준 빠씨.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빠씨. 빠씨라고 부르지 말랬는데, 글 쓰는 동안 수도 없이 '빠씨'를 써먹었다. 미인이니까 이 정도는 눈 감아주겠지. 


  선물하기에 앞서서 늘 고민이 앞섰다. 고민만 하다가 선물을 못한 적이 허다했다. 선물을 챙겨본 적이 없어서 선물의 목록이 머릿속에 아예 없었다. 상대가 내가 고른 걸 좋아할지 모르는데 선물을 한다는 게 어렵기만 했다. 상대의 마음에 꼭 드는 선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니 선물 고르는 게 수월해졌다. 


  오늘도 친구 생일 선물을 샀다. 멜란지 톤의 맨투맨 티셔츠. 화사한 봄. 친구가 그 티셔츠를 입고 친구와 가족과 함께 신나서 나들이 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페에 앉아있지만 봄볕이 느껴진다. 봄기운에 마음을 자꾸 뺏겨 글을 마무리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좋아하는 봄나물 머위가 귀엽게 올라왔다. 봄은 어딘가 귀엽다. 뜻밖의 선물을 하는 이도 어딘가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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