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권 읽기의 힘

by 글맘

서로의 사랑에 기대어 03_

하루 한 권 읽기의 힘


굵은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오후이다. 성난 더위에 물을 마시러 곁에 오면, 읽던 책을 덮어둔 채 차가운 얼음물을 흔들어 건네고 또 쌩하니 자전거를 굴리며 멀어지면, 다시 책을 들어올리는 늘그막한 오후.


그늘에 앉아 책을 손에 들고서 여름 날을 보내는 이 평온한 순간이 있기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방학을 기회 삼아 공부의 양을 좀 늘려보려는 자와

방학을 기회 삼아 기깔나게 한 번 놀아보려는 자들의 다툼!

우리집은 아무래도 놀아보려는 자들이 승리한 것 같다.

자전거 타러 나가는 아이들 옆에서

'책 읽기 먼저! 30분은 읽고 나가자!'라고

사정 아닌 사정을 하는 나의 모습은 정말 패자의 모습일테니까.


그래도 12살, 9살 아이들 앞에서 학습의 조급함을 들키지 않고(없진 않다) 편할 수 있는 건 책, 책 덕분인 것 같다. 오래 앉아 공부하지 않아도 좋은 책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도 오늘치 공부가 채워질 수도 있다고 믿고 이 믿음은 마음을 산뜻하게 해준다.


처음부터 책을 찾아 읽고 좋아하며 반복해 읽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성향과 기질에 책이라는 장난감이 잘 맞아 쉽게 친해지는 아이가 있고, 반대로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책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겠지. 세상에 책보다 더 즐거운 장난감은 무궁무진하니까. 그 어느쪽이라 하더라도 모든 아이들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건강하게 제 나름의 개성을 갖고 잘 자랄 거라 생각한다. 매일 책을 찾아 읽지 않아도 아이의 관심사 속에 책이 없어도 불안할 필요는 없다고,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엄마의 마음 속에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책 읽기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아이로, 인생이 던져주는 여러 기로에서 책으로 답을 구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한 조각 있다면 책의 결에 물들여줄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뿐이고, 나는 이 노력이 거창하지 않은 '하루 한 권 읽기' 정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책 읽기를 꽤 사랑하는 어른으로 자랐는데 유년시절 '책 읽어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책이 집에 꽤 많았고, 그중 마음에 드는 제목을 발견하면 뒤적여 보다가 행운으로 재미있는 부분을 만나면 킥킥거리다 덮는 게 읽기였다. 매일 루틴을 갖고 읽지도, 학년에 맞춰 읽지도 않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한 '즐거움'이 있었던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것도, 책 읽기 습관을 들여주려고 고민하던 것도 이 경험이 먼저 있었던 덕분인 것 같다.


소중한 아이와 책. 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면 그 사이에는 '마음'이란 것이 머문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이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거창한 마음부터 언젠가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을 때 시행착오를 덜 겪길 바라는 애끓는 마음이나 한국식 학교 생활 안에서 조금은 덜 고생스러운 시간들을 겪길 바라는 현실적인 마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아이에게도 소개해 주고 싶은 근원적인 즐거운 마음! 결국 부모란 이 모든 마음을 건네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이 마음이 어떤 상처도 흉터도 없이 고스란히 전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보면 이런 답에 닿곤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 한 권 읽기!


'하루 한 권 읽기'를 이야기하면 열에 아홉의 반응은 "에이, 그걸로 돼?"에 가깝다. "너니까 그렇지. 그 집 애들이니까 그렇지" 같은 대답들이 익숙하게 돌아오곤 하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읽고 지내온 시간들을 켜켜이 뒤적여 보아도 나는 '하루 한 권 읽기'가 전부인 순간이 참 많다.


책의 힘이란 이런 점에 있다. 오늘 읽은 한 권이 내일도 한 권을 데려와 준다는 점. 책은 책을 부르는 법이니까! 고작 한 권이라 할지라도 책이 품은 흐름과 서사가 내일의 한 권 읽기를 조금 더 즐겁고 편하게 해주곤 한다. 한 권의 첫 장을 펼치고 마지막 장을 닫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단단한 성취감이 내일의 읽기를 좀 더 수월히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한 권이라는 작은 언덕이 우리를 '달려볼까?' 마음 먹게 하는 법이니까. 이 모든 것의 첫 단추는 언제나 소박하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하루 한 권!


이 한 권이 때로는 스스로 읽는 한 권일 때도 있고, 때로는 엄마가 읽어주는 한 권, 때로는 짧은 그림책이나 때로는 두꺼운 동화가 될 때도 있다. 12살이 글자없는 그림책을 뒤적이면서 '오늘 한 권 끝!'이라고 말할 때는 꿀밤을 한 대 콕, 쥐어박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참아내곤 이런 마음을 보내본다.


"오늘 그 책을 고른 이유가 있어?"

"어떤 페이지가 제일 좋았어?"

"그 부분이 좋았던 이유가 뭘까?"


사실 책을 읽는 이유는 책에 기대어 내 안에 잠재된 마음을 꺼내어 보려는 것이니까. 한 권이든 열 권이든 그림책이든 줄글책이든 무엇이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건 책 읽는 아이의 마음에 한 걸음 성큼 다가가는 것, 그렇게 마주해 다정한 눈빛을 나누는 것 아닐까.


만약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오늘은 두 권 읽자!"라거나 "지금은 이 책을 읽어야 해!"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지금처럼 이렇게 서점이나 도서관을 힐링 스페이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책 선물을 받을 때 가장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이들이 하루 동안 책의 곁에서 머무는 시간이 뛰고 땀흘리는 시간보다 짧기를 바라게 된다. 그냥 눈길 닿은 곳곳에 재미있고 즐거운 책이 찰랑이길, 그래서 손을 뻗으면 한 권이 툭 잡히길 바라게 된다.

엄마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책의 선율에 점점 물들어가다가 문득 스스로 책을 펼치는 순간으로 나아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삶이 늘 그렇듯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어느 순간에 문득.



글 쓰는 엄마, 글맘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