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사랑에 기대어 04 __
한낮의 더위를 등지고, 도서관
두서없이 흩어지는 마음을 바라보는 아침 11시. 아침이라기엔 늦고, 점심이라기엔 이르고, 오후라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 하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하다. 내일부터 아이들 여름방학이 시작이라 나만의 고요한 아침은 오늘로서 당분간 넣어둬야 하기에 마음이 종종거리며 들뜨고 있달까. 한달 남짓한 여름 방학 동안 무얼하며 보낼까, 아니, 무엇으로 아드님들을 즐겁게 해드려야 하나 고민해 본다. 할아버지댁, 수영장, 계곡, 키즈카페,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곳. 도서관!
갔던 곳에 또 가길 좋아하는 조금 지루한 나의 취향이 가끔은 큰 행복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는데 아이들과 도서관에 다녀왔을 때다. 조금씩 달라지는 서가가 잘 느껴지는 이유는 다시갔기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일테니까.
몇 주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 들어 온 그림책이 줄지어 꽂혀 있는 곳에 한참을 머무는 아이의 뒷모습과 계절에 맞게 여름과일이나 곤충을 소재로 한 그림책이 시원하게 전시되어 있는 곳을 신나게 구경하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풍경처럼 마음을 채운다.
여행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고 가끔은 사소한 우연이 큰 기쁨의 계기가 되어 주듯 도서관도 그런 공간 같다. 생각지도 못했던 책들을 우연하게 만나 새로운 호기심 자극을 잔뜩 받을 수 있는 곳.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기발하고 새로운 책들을 만난 건 늘 도서관이었다. 아이들에겐 엉뚱한 책을 찾아내는 신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도서관에서 아이와 함께 서가를 걷다보면
아이의 손길이 닿는 것은 주로 재미 위주의 책이나
웃긴 제목이나 표지가 눈에 띄는 것처럼 순간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일 때가 많다. 서점에서도 마찬가지. "읽고싶은 책 골라보자" 라는 말에
엄마인 우리는 사소하게는 학습에 도움이 되거나 이번 방학을 기념할 만한 책, 넓게는 앞으로 커가면서 꼭 읽으면 좋을 책들을 염두해 두고 말하는거지만 아이들은 포켓몬 만화나 공포특집 만화 흔한남매 같은 책을 고르니까.
그래도 캐릭터, 만화, 똥, 귀신 이런 시시콜콜한 재미가 담긴 책들을 '독서의 마중물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환영해 주자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이런 책들에게는 책이라는 물성에 눈길을 주고 마음을 기울이게 도와주는 기특함이 있다.
12살이 된 첫째 아이를 무릎에 앉혀두고 책을 읽어주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아이들의 책 읽기가 마치 밸런스 게임 같을 때가 있다는 점이다.
독서의 마중물이되는 책과 독서의 깊이를 더할 책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밸런스!
마중물이 되는 책이란 책을 읽는 시간의 문을 열어주는 책이고, 깊이를 더해주는 책들은 하나의 주제를 몇 달에 걸쳐 읽으면서 생각에 깊이를 돕는 책들이다.
아이들과 책 읽기를 함께해 오면서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고
적절한 밸러스는 맞춰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참 자주 하게 된다.
30권짜리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에 맞춰 착착 읽어주면 좋겠지만, 아이들이 어디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 엄친아가 우리집에 있기란 참 어렵고, 엘리베이터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에 눈길을 고정시킨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사실 하루 한 권이라도 읽어주는 모습 그 자체가 정말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독서의 마중물이 되는 책들은 아이들이 느끼는 문턱이 낮다고, 스스로 잘 읽고 재미를 느끼면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가끔 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모를 때가 있다. 우리는 세상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인격체로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는 중이니까. 그래서 아이들이 고르르는 책을 보면 엄마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아이가 관심두는 게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보는 지표로 삼을 수도 있다.
아이가 보인 작은 관심이라는 지표를 토대로 '깊이를 더하는 책읽기'로 나아갈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해 주거나 건네줄 수 기회를 만들 때도 있다.
아이들과 도서관에 갈 때 가장 먼저 다짐하는 건 '비장한 각오는 내려두자'이다. 바퀴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가서 몇 십권 씩 책을 빌려 낑낑거리며 끌고 돌아가야지! 필독서 찾아서 읽혀야지! 탑처럼 쌓아두고 읽히고 와야지! 같은 비장한 각오들.
때로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고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사실 아이들과 도서관에 가는 발걸음은 이보다 가볍고 이보다 즐겁길 바라곤 한다.
요즘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주제나 부쩍 자주 이야기 하는 것들, 집에서 자주 읽는 책과 비슷한 내용을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거나 새롭게 구성해 놓은 책을 만나면 크나큰 행운이다.
오히려 진심으로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도서관에 온 '덕분에' 알게 된 새로운 책을 만나는 순간 같은 것. 어깨를 나란히 모은 책들이 꽃힌 서가를 '재미있는 책은 어디에 숨어있을까'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걸어보는 기분 같은 것.
걷다가 눈에 들어오는 제목이 보이면 꺼내어 표지를 훌어보다가
다시 꽂아두고, 또 꺼내어 보고, 또 꽂는 수많은 시행착오들과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고 한 권도 빌리지 않아도 좋은 책이 마련해주는 넉넉한 자유를 느껴보는 것.
"어?! 이런게 있네?"
"엄마, 이것 봐"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을 걸어오면 성공의 기쁨을 느낀다.
아이가 호기심이라는 배를 타고 새로운 책의 바다를 향해 항해할 준비를 하는 모습이니까.
"엄마 이거 어때?"하며 연령에 맞지 않거나
혹은 엄마 마음에 차지 않는 책을 보여줘도
"오, 그런 책이 있었네!" 하며
그 책만이 가진 매력을 아이와 함께 찾아 보면 좋겠다.
정말 기발하고 새로운 책을 찾았다는 칭찬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엄마의 손길이 아이들에게는 도서관의 온기로 남을 지도 모르니까.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경쟁하듯 비교해가며 읽는 것보다 도서관이라는 곳은 언제나 갈 수 있고, 언제나 즐겁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생애 유일한 시기란 어쩌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 속에 ‘육아 시간’이란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듯 사실 육아에도 ‘책육아’라는 건 따로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라는 ‘부모’들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평생 함께하며 변치않는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책이라는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니까.
똥, 경제, 역사.. 맥락도 일관성도 없이 그저 끌리는대로 빌려온 책들을 뒤적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쇼파에 앉아 까무룩 잠든 내 귓가를 멤돈다. 사각거리는 책장에 반사되는 빛이 우리 사이에 머물 때마다 고요한 사랑이 퍼진다.
“할아버지. 저녁 드셨어요?
우리는 오늘 도서관 갔다 왔어요.
재미있었어요.“
눈을 감은 채 아이들의 목소리를 엿듣는다.
오늘은 뭐할까? 도서관이 아이들에게 과연 재미있을까? 오늘도 괜히 시간 낭비 한 건 아닌가? 고민아닌 고민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이 목소리를 기억해야지 다짐한다.
언어에는 힘이 있어서 그저그런 평범한 순간도 ’재미있었다‘라는 말의 힘 덕분에 정말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언어의 힘은 결국 작은 경험에서 시작된다. 오늘처럼 이렇게 한낮의 더위를 등지고 다녀온 작은 경험 같은 것 안에서.
글 쓰는 엄마, 글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