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사랑에 기대어 11 _ 책 좋아하는 아이들의 입학 전 풍경
아이들의 말소리가 이불 속으로 가라앉고 하늘의 별처럼 생각이 쏟아지는 밤, 글을 써보려고 책상에 앉았다. 내 안에 무수한 반짝임으로 남은 어떤 기억들과 언어들을 무엇부터 종이로 옮겨볼까 고민하는데, 엉뚱하게도 놀이터에서 놀았던 것, 여름의 더위나 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자전거를 탔던 것,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던 아이들 어릴 적 일들이 떠올랐다.
거실에 장난감을 와르르 쏟아 두고 놀았던 날들, 레고 조각들로 자동차나 집을 만들던 순간들, 풀밭을 같이 뛰던 기억들, 내 마음이 이런 장면 곁에 오래 머물렀다. 추억 속이었다.
두 아이와 나, 우리 셋에게 책 읽기는 일종의 쉼표같다. 비가 오면 우비를, 눈이 오면 장화를 신고 놀았다가 집에 들어와 달콤한 휴식처럼 읽던 한 권의 책. 책 읽기는 안식이었다.
두 녀석들은 에너지가 큰 성향이었다. 몸을 움직이며 뛰어 노는 욕구가 충전되고 제 안에 쌓인 에너지가 발산되어야 비로소 미소를 보였다.
이런 아이들의 엄마로서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가?’ 자문할 때면 언제나 같은 답에 닿곤 했다. ’마음을 놓치지 않는 엄마‘가 되자. 아이들의 마음이 틔우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그래서 봄에는 반가운 햇살 따라, 여름에는 곤충 뒤꽁무늬, 가을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즐기는 마음으로, 겨울에는 시린 바람을 맛보려 매일 밖으로 나갔다. 같은 아파트 단지 지인들의 "또 나와 있어?", "아직도 놀아?"같은 놀라움 섞인 물음표를 받는 게 늘 나누는 인사의 첫머리였다.
매일 오래 놀아야 해소되는 아이의 욕구와 에너지들이 많이 버겁고 힘든 순간도 있었다. 한 두 시간 정도로는 전혀 해소되지 않고, 충분히 뛰며 놀았다고 생각해도 쉬이 만족하지 못하던 그 엄청난 에너지들! 그 뒤를 따라 다니다 집에 와서 '살림'이라 불리는 또 다른 엄마의 역할들을 하다보면 매일밤이 기진맥진이었다.
'내가 너무 아이의 욕구에 쉽게 굴복하는 건가?', '욕구에도 일정한 규제가 필요한게 당연하니까 놀이시간을 좀 줄여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갈등과 고민을 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이 원하는 욕구는 지극히 건강했다. "엄마,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요.", "엄마, 오늘은 자전거 타고 싶어요." 이를 거절하는 이유는 결국 아이를 어른의 틀에 맞추기 위함일 뿐아닌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해주는 ‘무언가’를 생각해 본다. 무한한 마음으로 주는 것들. 의식주처럼 당연한 것을 빼면 '사랑' 사랑만이 떠오른다. 아이를 위해 학원을 등록해 준다거나, 해외여행을 데려가주는 것들은 아득한 먼 곳에 머무는 ’선택‘일 뿐 그 근원에 머무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사랑만이 있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사랑은 언제나 거창하지 않다. 옳지 않은 일이야 당연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제지 함이 옳지만, 옳아 마땅한 욕구라면 피곤하고 귀찮다는 핑계로 거절하지 않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실천이다.
이 실천은 언제나 우리에게 정확한 몫을 돌려준다. '엄마'이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그런 몫이다. 성장의 신비가 증표처럼 손에 쥐어지는 것. 신나게 뛰고, 친구들을 만나 놀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고, 바람 결에 스민 안온함을 느끼는 아이들의 모습들, 무궁무진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게 느껴지던 모습들을 오롯이 바라보는 것들이다.
언젠가 첫째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 친구를 만났을 때는 내가 이렇게 말해 주면 돼. 그런 싸움이 안 생겨.", "5명 밖에 없을 때 그런 놀이는 별로야. 다른 걸 해야해. 그래야 평화롭게 놀 수 있어"
매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부대끼며 몸소 배워 터득한 '앎'일 것이다.
손을 번쩍 들고 학급 반장 선거에 나가 자신의 공약을 설명하며 득표를 얻어내는 12살 건강한 초딩으로 자라게 된 에너지는 이 '앎'에 근원한다 믿는다. 학원이나 수학선행 같은 것보다 자연에서 그리고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온몸으로 배운 자신만의 '앎'.
나중에야 몬테소리 교육의 철학 안에 자연, 놀이터 등의 바깥 활동을 통한 신체적 발산이나 체험이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정말 나중이었다. 아이의 욕구를 어른이자 엄마라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고 채워주려고 자연스레 같이 뒹굴고 땀흘린 것일 뿐, 우리가 햇살아래서 보낸 날들은 뭘 계획하거나 알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늘 신기했다. 얼굴이 벌겋게 익고 땀이 흐른 자국에 시커먼 먼지가 붙은 뒤에야 집으로 겨우 돌아오면 털썩 누워 책을 읽거나 글을 끄적이게 되는 에너지의 전환들. 언제 그렇게 뛰어 놀았던가 싶게 고요해지는 모습들. 아주 오래된 잠옷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감촉같은 안락한 분위기로 책 안에 쉬던 모습들.
아이들에게 책이 휴식이 되는 불씨 같은 순간을 꺼뜨리고 싶지 않아서 놀이터와 자연 그리고 책의 시간을 그야말로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지켜온 것 같다. 놀이터에서 자연에서 놀다 문득 길고 짧은 나뭇가지를 비교하는 아이를 볼 때, 나뭇잎이 뿜어내는 색의 차이를 느끼며 다양한 단어를 궁금해 할 때, 우리에게 작은 순간이
아이의 세상 전부임을 깨닫기도 했다.
결국 엄마를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건 책이나 교육, 이론이나 유명한 교수님들의 강의보다 내 곁에 시시각각 다른 빛을 뿜어내는 아이들의 모습, 그 아름다운 본연의 모습들이다.
지칠 때까지 뛰어 놀고, 책 안을 파고드는 휴식하는 아이의 시간을 정말 지켜주고 싶었다. 아이에게 책 읽기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아닌 문득 휴식이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곤 했다. 목마른 동물이 우물가에서 목을 축이듯 책 곁에 머물며 마음을 녹이는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책과 함께하는 삶의 순간들이 한 개인의 내면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이미 겪어 보아 알기에. 아이들에게 가장 남겨주고 싶은 마음의 유산은 언제나 이것이다.
글 쓰는 엄마, 글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