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껴서지 않고 활짝! 맞이하는 견딤

당신을 위한 리추얼 필사 편지 08

by 글맘

당신을 위한 리추얼 필사 편지 08 _ 비껴서지 않고 활짝!


**

물 한 방울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고 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하는 악업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불씨 하나가 온 산을 모두 태우는 법입니다.

__<진짜 나를 찾아라> p.226



연보라빛 노을이 물러가면 어스름이 내리고 이내 차가운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멤도는 과수원 마을. 시부모님은 사과 농사를 짓고 계셔요. 재미있게도 한때 제가 가장 멀리했던 과일은 사과였어요. 입 안에 퍼지는 그 차가움과 단단함이 상쾌한 단맛보다 앞서서 늘 달갑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사과 과수원에 시집을 와서 365일 냉장고에 사과가 찰랑이는 날들을 보내고 있죠. (무척 감사해요) 자주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인데다 사과 한 알이 얼마나 큰 수고로움 끝에 우리에게 오는지 알게 되서 이제는 매일 아침을 함께하게 되었어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과를 키우는 농부들은 사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요. 비료와 물을 주고, 때에 맞춰 농약을 치죠. 사과를 가리는 잎을 따주고 병충해는 없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살피며 나무 사이를 걷곤 해요.


어떤 일든은 기계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애석하게도 가장 고되고 힘든 일은 하필 기계의 힘도 빌릴 수 없더라구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거죠. 대표적으로 나무의 밑둥에 은박지처럼 생긴 기다란 비닐을 깔아주는 일이 그래요. 햇빛 반사판인데 사과의 품질은 골고루 붉게 물든 색이 결정하기도 하고 또 볕을 많이 받아야 당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초가을 이 작업은 사과 과수원에서 참 중요해요. 동시에 가장 고되기도 하죠. 허리를 숙이고 나무 아래를 기듯이 작업해야 하니까요.


사과의 수확은 보통 10월에 시작해 11월 초에 마무리 해요. 상대적으로 보관 기간이 긴 과일이라 그때 수확한 사과를 1년에 걸쳐서 먹게 되는데 같은 시기에 수확한 사과 중에서도 유독 보관 상태가 좋은 사과들이 있어요. 똑같은 상자 안에 있어도 금방 쭈굴쭈굴해지는 사과가 있고, 여전히 알이 단단한 사과가 있죠.


그런데 그 차이가 자글거리는 가을의 볕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반사 비닐에 부딪힌 빛을 통해 사과 한 알 마다 얼마나 골고루 빛을 받았는지 그리고 동시에 차가운 서리를 얼마나 더 맞았냐에 따라 다르다고 해요. 해뜨기 전 냉기 가능한 땅의 에너지가 대기 중의 수증기를 얼어붙이고 그것이 내려앉는 서리!


한낮의 더위와 새벽의 추위를 더 더 많이 맞고 견디는 사과가 1년 내내 단단함을 유지하는 셈이죠. 가을의 새벽에 차갑게 얼어붙었다가 한낮의 볕에 붉게 익기를 반복하면서 제 살을 단단히 해나가는 사과!


속을 채운다는 것은 모두 이런 모양일지도 모르겠어요. 온화한 온기이나 상쾌한 바람만으로는 불가능한 것. 치가 떨리는 추위나 도망치고 싶게 따가운 볕을 견딘 후에만 허락되는 무르익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꾸만 일기장을 펼쳐 끄적이게 되요.


'와라, 와라, 무엇이든 와라.

한 발도 도망치지 않고, 한 발도 비껴서지 않고

무엇이든 온전히 마주해주지!‘


그렇게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금 단단해져요. 삶이란 결국 사과 한 알이 붉어지는 과정과 닮았으니까요. 뜨겁게 달아오르는 순간이 있으면, 그만큼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는 시간도 있는 법이에요. 그 두 시절을 함께 통과해야만 비로소 내면이 익어가고, 빛을 머금은 단단한 나로 완성되는 거겠죠.


우리 각자의 과수원에도 붉고 단단한 사과들이 영글어가길 바라며.


**

천국에 이르는 길은

당신이 세상에 보내는

경의의 몸짓에 놓여 있지.

__<기러기> p.97


오늘도 나답게 나아가는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

리추얼 필사, 글맘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