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주부 _ ep 01
#눈물이 나를 깨우기 전까지는
흘러간 시간들이 하얀 노트에 도착하는 세계가 있다면, 나는 조용히 그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오래 머물고 싶다. 그러다 문득 내게서 멀어졌던 시간의 조각들이 노트 위에 윤슬처럼 가라앉을 때, 시간의 허리춤을 붙잡고 천천히 되짚어보고 싶다. 명료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은 나의 이야기.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빛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져 있다.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기울어진 이 날을 시작으로 품는다.
선명히 기억한다. 너무나도 평범했던 그날을.
우유와 빵부스러기, 바나나 껍질과 요거트 뚜겅이 어지러이 남아 있던 식탁. 뒤집어 벗은 잠옷이 쇼파에 걸쳐 있고 언제 쏟아졌는지 모를 장난감 박스가 뒤집혀 있던 거실 바닥. 장난꾸러기 두 아들이 휩쓸고 간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집 안에는 잠시 고요가 깃든다. 나는 창을 활짝 열고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집으로 출근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내게 집은 작은 일터였다. 씩씩하게 일어나 침대 위를 정돈하고 식탁과 싱크대를 말끔히 치운 뒤 청소기를 돌렸다. 드디어 쉬는 시간이 되면, 일정하게 들려오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면서 믹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내 손 끝에서 정갈해 진 집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 순간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안정된 가정, 안정된 삶을 꿈꿨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믿었던 안정된 삶은 지극히 통속적인 한국 드라마 속 한 장면 같다. 착실히 회사에 출근하는 남편,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아이들, 살림을 도맡은 나, 평범한 아파트 단지 속 우리집과 4인 가족을 위한 자가용, 주말에 외식과 몇 달에 한 번 떠나는 여행 같은 것으로 대표되는 평범한 삶. 그런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좇아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는 일에 평균값의 노력이 필수이며 그 끝에 도달하는 건 안정된 삶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출판편집자로 근무하다가 첫째를 낳고 퇴사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아이 키우고 다시 올게요” 팀장님께 그렇게 말했다. 그게 10년 전이었다. 서운하고 섭섭했지만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래도록 꿈꿨던 나의 꿈에서 물러난다는 감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래, 우선은 아이와 가정이 중요하니까.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다시 나도 일을 할 수 있을거야.'라고 쉽게 단념했달까.
1년 차이로 먼저 취업했던 남편이 차곡차곡 승진해 나갔다. 새 명함이 식탁 위에 놓일 때면, 내 일처럼 아니 내 일보다도 더 기뻤지만 때로는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회생활의 아쉬움이 마음에 슬며시 번지곤 했다. 출판사 동기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어떤 책을 만들고 있을까. 나는 마음의 서랍 깊숙이 넣어 둔 내 명함을 떠올리며 괜찮다고, 괜찮아야 한다고 지금은 엄마이자 주부로 사는 게 중요한 때라고 마음을 닫아두곤 했다.
10살 첫째, 7살 둘째를 키우던 육아 10년 차. 경단녀 주부이자 아줌마이자 애엄마이던 2022년 그 여름. 지극히 '평범'이라 불리는 것들이, 흔히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그런 삶이 내게는 목표였으니까. 그날 갑작스레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전까지는.
믹스커피가 아쉬운 한 모금 쯤 남았을 때 세탁 완료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리듬이었다. 마음 한 구석이 어딘지 모르게 뻐근했지만 평소와 다를 것도 없었다. 건조기 동작 버튼을 누르고 마트로 향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과 저녁 식탁에 올릴 반찬거리를 사야 했다. 내 손에 식구들의 건강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때론 으쓱한 자부심이 때론 어디론가 숨고 싶은 부담감이 들곤 했다. 가끔은 대견했고, 가끔은 버거웠다. 책임감과 피로가 같은 무게로 어깨에 걸쳐 있던 날들이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 정리를 해두고 건조된 빨래를 한 아름 안고 쇼파에 앉았다.
걷어 둔 블라인드와 창 사이로 햇살에 비쳐 아름다운 무늬가 일렁였다. 그런데 그 순간 눈물이 뚝 떨어졌다. ‘햇빛 때문인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창을 조금 더 열었다. 또 다시 뚝, 뚝, 뚝. 열린 창으로 밀려든 초여름의 바람이 눈물로 젖은 뺨에 닿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빛과 바람과 나와 눈물만이 존재하는 시공간 속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울고 싶어서 운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 나를 내가 이해할 수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내가 바라던 안정된 삶 속 하루하루 아니던가. 더군다나 오늘은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곧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 나는 누군가에게도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
눈물이 멈추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간이 흘렀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 퍼지는 물결의 파동처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던 순간이었다.
놀이터에서 뛰어오는 아이들의 모습보다 흩어져 흘러가는 구름에 더 눈길이 머물렀다. 그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일상의 수면 위를 분주히 오가는 날들 속에서도 내내 마음이 두척였다. 아무 일도 없던 하루들이 이어졌지만 그날의 눈물은 오래 남았다. 이유를 몰랐던 그 눈물이, 내 안의 이야기를 깨우기 시작한 건 그 후부터였다.
글 쓰는 엄마, 글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