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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Jan 02. 2022

다섯 번째 걷기 중 "효창원"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묘,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효창원로를 따라가다 청파초등학교를 지나면 청파 언덕의 본 주인인 효창공원이 나온다. 본래 이곳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모친 의빈 성씨가 안치된 ‘효창묘(孝昌墓)’로 처음 조성되었다. 의빈 성씨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사랑은 역사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하다. 왕위를 이어야 할 첫 아들에 대한 사랑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정조가 그토록 절절히 아끼고 사랑한 두 사람이지만 문효세자는 다섯 살 어린나이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의빈 성씨 역시 같은 해 임신 중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 어떠한 슬픔이 정조의 상심보다 컸겠는가? 맘 같아선 궁궐 내에라도 묘를 만들고 싶었겠지만 조선에는 도성 내에 능을 조성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이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궁에서 채 10리(4킬로미터)가 떨어지지 않은 청파 언덕에 사랑하는 두 사람의 묫자리를 마련했다. 아쉬우나마 조선왕조 왕실 묘역 중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이후 효창묘는 조선 말 고종에 의해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되었다.
청파초등학교 방향에서 바라본 효창공원(효창원 자리)
이렇게 정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소중하고 귀하게 보전되어온 공간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처참히 짓밟히고 훼손되었다. 일본인들에게 효창원 터는 기차역에 인접하고 남동 방향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명당이자 아깝게 놀고 있는 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일제(조선 철도국)는 1921년 효창원을 둘러싼 울창한 소나무숲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골프장을 조성하였다. 아홉 개의 홀로 된 골프 코스는 흡사 점령군처럼 문효세자의 묘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골프장은 3년 만에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지만 대신 그 자리엔 공원과 유원지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패망하기 한 해 전인 1944년, 태평양전쟁 희생자의 충령탑을 설치한다는 명분으로 공원 내 모든 묘역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시켰다. 초라하나마 힘겹게 유지되던 왕실의 묘역이자 정조의 가슴 아픈 사랑의 역사는 그렇게 효창원 터에서 완전하게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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