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예스 24 7문 7답
헝가리 출장 기간 동안, (일부러) 시차 적응을 온전하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른 새벽 시간, 온 세상이 고요한 세상에 책상에 앉아 글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게 무척이나 '보람차다'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출장기간 일부러 밤 9~10시면 서둘러 잠을 청하곤 했다.) 물론 지나고 나면 감상 투성이의 대단한 글들은 아니었는데, 그냥 고요한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음 그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아래 7문 7 답은 이메일로 날아온 질문지를 그 새벽 시간에 썼다. 인터뷰 형식이지만, 솔직히 내가 인터뷰를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서, 그냥 일기를 쓰듯, 독백을 하듯 주저리주저리 답을 했다.
http://ch.yes24.com/Article/View/46665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에 담긴 제 그림들은 ‘조금 더 정성을 들인 낙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닌, 그저 그리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며, 거기에 저의 감정을 반영하는 수단이라고나 할까요? (2021.12.23)
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
이종욱 저자
아주 멋진 드로잉 에세이로 작가 데뷔를 하셨어요.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첫 책을 내신 소감을 들려주세요.
흐물흐물한 원고가 견고한 책으로 완성되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 않으리란 건 짐작했지만, 이렇게나 어렵고 많은 노력이 들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알고서는 시작도 못 했겠다’ 싶달까요?
어떤 서평 기사에서는 저를 ‘건축가’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저는 평범한 직장인에 가깝습니다. 새벽 여섯 시 힘겹게 눈을 떠 여덟 시까지 출근을 하며, 오후 다섯 시가 넘으면 눈치를 보며 퇴근할까 좀 더 있을까 고민하지요. 다만 조금 유별난 게 있다면, 여느 직장인처럼 스트레스를 음주나 휴식으로 풀지 않고, 대신 가급적 걷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그리는 방식으로 푼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별다른 관심 없이 지나치던 장소들이 자주 걷다 보면 애정이 가고, 관심이 생기고, 알고 싶어져 글을 쓰게 됩니다. 말과 글로는 채울 수 없는 것들을 그림으로 남기고요. 제 책에는 그렇게 퇴근 후, 아니면 주말 동안 아내와 아들과 함께 걸었던 (예전에 살던) 집 주변의 여러 길과 동네들이 엮여 있습니다.
문화역서울 284
본업은 건축사이신데 언제 이런 글과 그림을 다 준비하셨는지, 열정과 실력이 놀랍습니다.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으신지요?
2013년, 임신한 아내의 체중 조절을 위해 본격적으로 함께 시작한 도시 걷기는 생각보다 훨씬 즐겁고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이십 대 때 서울 곳곳에 뿌렸던 소중한 시간들을 회수하는 즐거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기억들이 녹아 있는 장소에는 특히 애정이 가고, 그 애정이 도시 걷기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파편처럼 산재했던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연속적인 걷기를 통해서 연결되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은 숭례문을 보러 갔고, 어느 날은 우정아트센터(옛 로댕갤러리)를 찾았으며, 어느 날은 맛집을 찾아 진주회관에 들렀지요. 물론 각 장소는 각기 다른 날, 각각의 대중교통을 통해, 오로지 그 목적지만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한데, 도시 걷기를 하다 보니 그러한 공간들을 하나의 경로로,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제가 발견한,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도시 걷기의 즐거움이었습니다. 파편화된 기억들이 연속된 공간으로 엮이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이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게) 놀라운 경험이었고, 그런 즐거움을 간직하고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고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글과 그림이 하나둘 쌓이면서, 이것들을 하나로 묶으면 개인적으로나, 서울을 사랑하는 다른 이들에게나 의미 있는 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2014년에 처음 했으니, 책이 나오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네요.
책에 총 일곱 가지 서울 걷기 경로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코스를 꼽으신다면요?
책에 소개되는 코스 중 정동, 서촌, 청계천, 해방촌, 경의선숲길, 신촌, 홍대앞 등은 이미 관광지화 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동네입니다. 이러한 동네들을 다룬 책과 그 밖의 정보들도 많고도 많지요. 사실 제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잘 전달되었을지 걱정이지만) 특정한 목적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동네에 이르기까지의 평범한 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숭례문에서 해방촌으로 걸어가는 길에 거쳤던 후암동의 아기자기한 골목들, 제 아버지의 유년 시절 사연이 녹아 있는 삼광초등학교, 일제강점기의 가슴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해방촌 108하늘계단 등, 차를 타고 무심히 지나치기엔 너무 아까운 흔적들, 그런 모든 것들이 그 길 위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적지에서 목적지로 이어지는 경로에는 제가 책에서 미처 제시하지 못한,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아직 발견해내지 못한 각 산책자만의 소중한 보물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책 서두에도 써 두었지만, 대강의 목적지를 정한 뒤에는 즉흥적으로 여기저기, 이 골목 저 골목, 자신만의 경로를 찾아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명동성당과 가톨릭회관
보자마자 눈이 확 뜨이는 정성스러운 그림들이 책 속에 가득합니다. 그림과 함께여서 그런지 글 역시 참 잘 읽히네요. 글 곳곳에 문학작품의 문장도 많이 인용하셔서, 문학에 대한 작가님의 애정도 느껴지고요. 혹시 건축 종사자 말고 소설가나 화가도 꿈꿔 본 적 있지 않으실까 싶은 정도인데요, 글과 그림 솜씨는 어떻게 갈고닦으셨는지요?
제 아버지는 국어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시집과 소설책이 많이 있었지요. 고등학생 때나 재수생 시절, 공부하다 지겨울 때면 ‘언어영역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순한(?) 목적으로 문학작품, 특히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그러다가 문학에 흥미를 갖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학청년까지는 아니었지만, TV를 보는 것보다 소설이나 산문을 읽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직장인이 된 이후 문학 서적을 탐독하는 데 좀 소홀해지긴 했는데, 몇 해 전부터는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으로 문학작품을 즐기며 지루한 출퇴근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불순한 의도’는 여전합니다. 문학작품 속에는 어떤 공간을 아주 감성적으로 또는 냉철하게 바라보는, 저는 따라가지 못할 뛰어난 작가들의 시선이 있으니까요. 저는 그러한 다른 시선을 빌려 오고 싶었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 보니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확실히 문제가 많네요!) 공부하다가 지겨우면 교과서 여백이나 문제집 빈 구석에 낙서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당시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엄청나게 인기였는데, 거기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어요. 제가 남들보다 빨리 건축을 전공으로 삼겠다고 마음먹게 된 데는 그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찌 보면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에 담긴 제 그림들은 ‘조금 더 정성을 들인 낙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내겠다는 생각으로 그린 그림이 아닌, 그저 그리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며, 거기에 저의 감정을 반영하는 수단이라고나 할까요?
쉬어 가는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책으로 꾸려 내겠다고 마음먹으신 후 원고와 그림을 정리하고, 출판사와 접촉하여 협의하고, 책을 편집하여 내기까지 힘들거나 재미있었던 게 있다면요?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고를 쓰면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리란 착각을 했었습니다. 요즘 말로 ‘근자감’이었죠. 물론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투고한 다음 날부터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투고 초기, 제 원고에 그나마 큰 관심을 보였던 두 출판사 중 한 곳로부터 최종 거절을 당하고 잔뜩 실망한 채로 귀가하던 길이었죠. 제 원고를 가장 좋게 봐 주셨던 뜨인돌출판의 담당 팀장님이 (다른 날 연락 주셨으면 좋았으련만!) 귀신처럼 알고는 전화를 걸어와 “뜨인돌에서도 출간이 어렵다”는 결과를 들려주시어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한때 유행하던 말로, 저를 ‘두 번 죽인’ 거죠. 하지만 저는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수개월간 원고를 수정했고요, 다행히 그 팀장님이 새 원고에 가장 먼저 호응해 주시고 가장 좋게 봐 주셨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제 원고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팀장님, 감사해요!)
아직 제대로 답사해 보지 못한 곳들 중, 언제고 꼭 가서 그곳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지역이 있다면요? 또는 책에 미처 싣지 못한 장소와 그림들이 있다면 여기서 조금 소개해 주세요.
최근에 아내, 아들, 어머니와 함께 한양도성 성곽 길을 따라, 신당동에서 흥인지문을 거쳐 북악산을 지나 부암동까지 걸었습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요, 이화동, 혜화동, 성북동 일대는 제 어머니께서 고교 시절을 보낸 동네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 전에 자주 만났던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고요.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동네들에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생각하니 그곳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더라고요. 기회가 된다면 서울의 북쪽 동네들을 진득하게 걸어 보고 싶습니다.
이즈음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글과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동네는 ‘기억’이 남아 있는 곳들입니다. 개인의 기억에서 시작하지만, 그런 추억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동네 말입니다. 제 책에는 담지 못했는데, 이를테면 용산전기상가 같은 곳이 적합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워크맨을 골랐던 추억, 그러면서도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던 시간들, 구름다리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했던 미로 같은 공간들……. 아직은 글과 그림이 충분히 숙성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런 공간들이 품고 있던 설렘까지 글과 그림 속에 녹여 내고 싶습니다.
만리재 인근 언덕마을
마지막으로, 작가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들려주세요. 그리고 독자께 전하고픈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예전에는 뭐랄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전공을 건축으로 정하면서는 성공한 건축가를 꿈꾸기도 했지요. 고백하자면,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일종의 좌절감과 패배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삶의 가치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시기였지요. 한데, 무슨 약장수 과장 광고처럼, 도시 걷기를 하면서 신기하게도 그런 기분이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제가 걸은 길에 대해 책을 쓰는 동안, 가족과 함께 걸었던 장소들, 그곳에서 보낸 시간, 그것들을 정리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시간 모두가 너무 소중하고 즐거웠습니다.
격한 감동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즐거움이 지속된다면 내 인생은 정말 살 만한 것이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달까요. 그래서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걷고, 쓰고, 그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제약이 없습니다. 책에서 다루지 못한 서울의 다른 지역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지금 살고 있는 도시, 수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수개월 이상 머물렀던 다른 나라의 도시들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제 책을 보면 아시겠지만,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사는 곳에 조그만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입니다. 근래 각광받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현란한 플랫폼의 콘텐츠들에 비하자면, 현실 세계는 좀 밍밍하고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자,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그러한 공간에 가급적 많은 사연들을 뿌리시고, 훗날 많은 추억들을 거두시길 독자들께 권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