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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Nov 24. 2021

미처 책에 담지 못한 동네1

'공덕동' 중 일부,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예로부터 사람들은 장벽과 같은 산줄기를 넘어 다른 고장으로 이동할 때 능선의 가장 낮은 부분인 고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고개에는 길이 생겼으며 자연스럽게 고갯길은 다른 지역,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길목이 되었다. 만리고개 역시 아현동과 서계동 구릉지 능선의 가장 낮은 부분으로 서울 도심, 숭례문, 서울역 등에서 마포 일대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 역할을 하였다. 


아직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마포 쪽에 걸려 있었어. 만리재 비탈길 양쪽에는 솜틀집이며, 구두수선방, 세탁소, 구멍가게, 복덕방, 싸전 연탄집 등등으로 서울 변두리 어느 골목보다도 살림살이의 번잡한 활기가 가득했지. 어린아이들은 아랫도리를 벗고 썰렁한 봄바람을 이기며 신나게 뛰어놀았어.
(황석영 / 흐르지 않는 강)


만리고개 넘어 공덕동 일대에는 불과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도시형 한옥들이 숨 쉴 틈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과연 주소만으로 모르는 집을 찾아가는 것이 가능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이러한 숨 막히는 동네를 관통했던 만리재옛길은 왕복 6차선 신작로인 만리재로(1976년 준공)가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 도심과 마포, 공덕 일대를 이어주는 주된 길목으로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다양한 시간의 흔적들을 길 곳곳에 품게 되었다. 


방석집이 친구네 올라가는 언덕길 옆에 나란히 붙어서 장사를 하는데 예전에 시골에서 보았던 앳된 아가씨가 아니다. 가게 출입문을 열어놓고 발을 내려서 안이 살짝살짝 보이는데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한복 차림으로 앉아서 잡담하는 모습도 보이고 고스톱을 치는지 쭈그리고 앉아서 화투패를 돌린다.
(원영모 / 1982, 서울)


일명 ‘방석집’이라 불리는 옛 유흥 주점 역시 만리재옛길이 품고 있는 시간의 흔적 중 하나이다. 만리재옛길로 서울 도심을 왕래하던 시절, 일과를 마친 직장인과 노동자들은 퇴근길에 슬쩍 옆길로 빠져 이러한 술집에서 그날의 유흥을 즐겼다. ‘벗’, ‘길목’, ‘봉주르’, ‘궁전’ 등 옛 시절 낭만이 느껴지는 간판들을 볼 때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곤 한다. 




 


만리재옛길 남쪽 끝단과 가까워질 때 즈음 날카로운 길모퉁이 한 편으로 어수선하나 활기 넘치는 전통 시장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6·25 전쟁 이후 비인가 노점상에서 시작된 마포공덕시장은 1960년대 후반 지금과 같은 시장 건물이 지어지며 정식으로 개장하였고 1970~80년대를 거치며 마포구를 대표하는 전통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대형 할인 마트의 등장으로 매출이 크게 줄기도 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대형 마트에서는 좀처럼 맛이 나지 않는 족발과 순대, 전, 빈대떡 등을 인근 직장인들과 주민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시장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다. 

신공덕동에 살던 당시 나의 집이 마포공덕시장과 무척이나 가까웠던 터라 나는 시장 족발집이나 순대집에 자주 들렀다. 아들내미가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산모가 족발을 먹으면 젖이 잘 돈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는 마포공덕시장에서 족발을 잔뜩 사서 아내에게 건네기도 했었다. 유별나게 맛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왠지 그 분위기가 좋았다. 퇴근길, 마포공덕시장 순대집과 족발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 허름한 가게 안에서 조촐한 먹거리에 마냥 행복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나의 기분까지 좋아졌다. 하지만 이런 마포공덕시장도 2010년부터 정비 사업을 인가받고 지지부진한 재개발 절차를 밟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낡은 시장이 철거되고 그 위에 주상 복합, 오피스텔, 상업시설 등이 새롭게 들어설 예정이라 하는데, 새 건물 안에서 쇼핑을 하고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도, 그때도 역시 나의 기분이 좋아질지는 장담할 수 없겠다.




2021년 11월 24일, 정말 어렵게 어렵게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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