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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Nov 25. 2021

미처 책에 담지 못한 동네2

'한남동' 중 일부,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이태원로에서 한 꺼풀 안쪽으로 난 이면도로(보광로59길, 60길)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보광초등학교에 면한 우사단10길에 이른다. 길 안쪽으로 접어들면 전형적인 상가 건물이 만든 획일적인 스카이라인 너머로 비 획일적인 첨탑 두 개가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미나렛으로도 불리는 이 첨탑은 돔과 함께 이슬람 성원(Masjid)을 상징하는 건축 요소이다. 먼 곳에서도 이슬람 성원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 주고, 예배 시간을 알리는 외침이 먼 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이슬람 성원의 첨탑은 높고 화려한 것이 특징인데 그 의도대로 서울중앙성원의 첨탑은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에서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구조물임은 분명하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붐과 석유 파동을 동시에 겪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중동 산유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울 내 대규모 이슬람성원 건설을 추진한다. 그리하여 정부는 국유지를 제공하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은 공사비를 전액 지원함으로써 1976년 지금의 자리에 낯선 종교 시설이 들어설 수 있었다. 한국에서 보편화되지 못한 이슬람교의 대규모 종교시설이 별다른 무리 없이 한남동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동네에 영외 거주 미군을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동남아 출신의 외국인들이 거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슬림이라고 특별히 차별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렇게 서울중앙성원은 지독히도 한국적인 풍경을 띤 한남동 언덕의 꼭대기에 자리할 수 있었으며 이후 한남동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우사단로10길을 따라 ‘ㄴ’자 형상으로 들어선 서울중앙성원의 부속 건물에는 이슬람 교육 문화원, 선교원, 할랄(Halal) 식당과 터키식 빵집 등이 들어서 있다. 수년 전 아내와 함께 처음 우사단길을 들였을 때 갓 구운 빵 냄새에 자석처럼 이곳 빵집으로 이끌렸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빵집 맞은편 대사관로6길 내리막 계단 앞에 서서 발아래로 펼쳐진 한남동 풍경을 내려다보며 기분 좋게 빵을 뜯어먹었다. (이제는 둘이 아닌 아들 포함, 셋이 되었지만 터키식 빵은 여전히 싸고 맛이 좋다.) 

계단 꼭대기에 서 있으면 능선을 뒤덮은 점토 벽돌무덤과 그 너머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는 한강이 시원스레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필두로 대한민국 부의 중심, 강남 고층 빌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강 하나 차이인데 이렇게 대조적일 수 있을까? 이곳 한남동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강 건너 남쪽 동네에 전개된 개발 시대를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남동 일대에 주거지가 들어선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전쟁이나 재해로 집을 잃은 사람들은 볕이 좋고 물이 차지 않는 한남동 구릉지에 자리를 잡고 판잣집을 지었다. 몇 번의 강제 철거가 있었지만 판자촌은 사라지지 않고 잡초처럼 되살아났으며 오히려 1960년대부터 판자촌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이태원, 한남동, 보광동이 포함된 ‘무허가 건물 양성화 사업(1971년)’을 발표한다. 소방 도로와 하수도 등의 시설을 갖추고 건축법을 준수한 개축을 조건으로 국유지 불하와 건축 허가가 이루어진 이 사업을 통해 많은 판잣집이 자진 철거되고 대신 조적조 연립주택과 단독주택들이 한남동을 뒤덮기 시작했다. 

개발 시대, 다들 서울로 몰려드는 바람에 서울시의 주택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다양한 방식의 주택 공급 정책이 나왔지만 늘 역부족이었다. 단독주택 한 채에 여러 가구가 임대 거주하는 불법 행위가 성행하게 되자 결국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다세대주택(1984년)과 다가구주택(1990년)을 법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저렴한 주거지를 빠르게 공급하는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다세대, 다가구주택은 경제적 효용성을 최우선으로 하였기에 한계 또한 분명했다. 좁은 필지 위로 높게 솟은 주택들이 답답하게 들어차면서 주거환경은 열악해졌고 공용공간은 부족해졌으며 마당이나 골목길이 주는 아늑함은 사라졌다. 주택가의 경관은 하나같이 붉은 벽돌과 눈썹 지붕, 노란 물탱크 등으로 획일적이며 단조로워졌다. 

이 시기 한남동 일대 수많은 집들 역시 다세대, 다가구주택들로 대체되었고 그렇게 조성된 동네 경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만 구릉지가 밋밋한 경관을 살렸다고나 할까? 구릉지 위 자연 발생적인 도시 조직은 획일적인 집들조차 그 구성이 다채로우며 주변 대지와도 입체적으로 관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무뿌리와 같은 한남동 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곳곳마다 흥미롭게 변화하는 가로경관과 구릉지와 긴밀하게 얽혀있는 - 이름 없는 건축가의 - 멋진 건축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가 어느 동네보다 쏠쏠하다.

그렇게 뻔하지만 흥미로운 골목과 집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한남동 언덕 능선은 이슬람 성원 정문에서 한강 방향으로 한광교회까지 약 600미터에 이르는 평탄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보통 이 길을 우사단길이라 부른다. 우사단(雩祀壇)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제단이 이 근방에서 발견된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전통적으로 기다림에 익숙한 동네인가 보다. 재개발 역사상 최대 규모 사업지라고 하는 ‘한남3구역’은 이 우사단길이 포함된 28만 제곱미터의 광활한 구릉지를 아우른다. 


2003년 처음 ‘한남뉴타운 재개발계획’이 발표되어 2012년 조합 설립 인가가 난 이후에도 재개발 사업은 수 차례 건축 심의와 인허가 지연을 겪었으며 2015년 전면 재검토, 2019년 사업 시행 인가와 건설사 입찰 무효, 2020년 건설사 재선정(현대건설)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끝날 줄 모르는 기나긴 여정을 이어왔다. 지루하고 맥 빠지는 재개발 사업이 더디게 진행되던 와중 흥미롭게도 우사단길 역시 ‘뜨는 동네’가 되고 말았다. 

재개발사업이 확정되고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2010년부터 건축 행위가 제한되자 한남동 일대의 주택과 상가들은 빠르게 노후화되었다. 빈집과 문을 닫은 점포들이 늘어났고 그리하여 값싼 셋방을 찾아 떠도는 저소득 계층과 인근 이태원을 생활권으로 삼고 있는 남아시아·중동 출신 인종적 소수자,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적 소수자들이 우사단길을 포함한 한남동 일대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소수자들을 위한 근린생활시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우사단길은 2012년 청년 사업가를 주축으로 한 마을 공동체, 우사단단이 결성되며 변화가 찾아왔다. 예술가, 디자이너, 소상공인들 역시 저렴한 임대료와 이태원 인접성, 이국적 동네 분위기, 편리한 교통 등을 이유로 우사단길에 정착하게 되었고 오래지 않아 길 곳곳엔 작업실, 공방, 전시실, 레코드점과 함께 이색적인 카페, 식당, 술집 등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태원과 가까우며 극적인 한강 조망이 가능하고 이슬람 성원 등으로 이국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우사단길은 서울의 여느 동네들과 구분되는 분명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 덕에 우사단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사단길의 흥망성쇠를 되짚어보면, 먼저 다녀간 해방촌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변화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우사단길이 포함된 이곳 한남동은 여전히 투자자들과 건설업자, 주택 수요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상 최대 재개발 사업지이자 부동산 핫플레이스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우사단길을 따라 뿌리를 내린 다양한 삶터는 끝이 보이는 운명을 향해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책에 싣지 못한 가장 아쉬운 그림입니다.

오늘날 우사단길을 걷노라면 내가 처음 이곳을 들렸던 2010년대 초반과 도시 조직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동네의 활기는 물론이요 거리의 공기마저 그때와 다르게 느껴진다. 낡고 초라하나마 주민들만의 삶터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유무는 이렇게 도시의 공기마저 바꾼다.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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