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에서 출판까지 2
투고와 거절,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4. 계획을 하고 그림을 그리다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무엇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미지는 유명한 관광지나 잘 알려진 건축물 주변의 경관 그림이 아닌, 목적지에서 목적지로 이어지는 길, 그 평범하고 별 볼일 없는 이름 없는 동네의 풍경이었다. 실제로 그 평범한 동네와 거리는 아내와 내가 가장 빈번하게 걸었던 코스이자, 가장 사랑했던 걷기 경로였다. 그리하여 집에서 신촌까지, 홍대입구까지, 서촌까지, 청계천 세운상가까지, 남산까지, 용산전자상가까지(이 부분은 실제 책에는 실리지 못했다)의 코스가 자연스럽게 생겼다. 2017년 초 즈음 이렇게 코스가 계획되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 코스를 걷는 동안 내가 바라보고, 사랑하고, 인상 깊게 느낀 풍경들의 스케치였다. 그래서 나는 주말을 이용하여 일전에 아내와 걸었던 길을 아내와 아들, 나 셋이 다시 걸으며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진을 찍었고, 집에 돌아와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동네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풍경을 골라서 스케치북에 옮겼다. 아무리 늦은 퇴근일지라도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렸다. (한창 그림을 그릴 때 평균 수명시간은 5시간 채 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 미국에 생긴 또 다른 프로젝트로 인하여 8개월 가까이 미국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에서도 퇴근만 하면 좁은 방에 틀어 박혀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을 그리는데 썼다. 내가 잠시 머물었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퇴근 후 한가하게 걸을 곳이 없는, 지독한 시골 동네였기에, 어떻게 보면 그림 그리기엔 딱 좋은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5. 글을 쓰다
우여곡절 끝에 2019년 봄, 내가 생각했던 모든 코스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슬슬 '이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압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실 좀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처음 각각의 코스들을 걸으면서 그 코스가 경유하는 동네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기본적인 역사, 도시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남들에게 설명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은 원인도 있었다. 무엇인가 내가 받은 감흥을 전달해야 하는데, 그것들이 그 동네의 역사, 건축, 사회 이야기가 두서없이 나열되기만 했다. 심지어 그러한 정보 조차도 수집하는데 수개월 이상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루의 대부분은 직장에서, 퇴근 후엔 아들과 놀다가 아들이 잠든 후 내가 잠들기 전까지의 자투리 시간만을 이용했으니 진도는 나가지 않고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어떻게 꾸역꾸역 한 코스에 대한 글을 완성하고 이어 다른 코스의 글을 쓰다가 예전 글을 다시 읽으면, 마치 청소년 시절 쓴 일기를 보는 것처럼 부끄럽고 민망하여 글 전체를 다시 쓰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로지 글에만 매달렸다.
시간은 흐르고 해가 바꿨다. 그리고 코로나가 창궐했다. 외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주말은 물론이요 기나긴 연휴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코로나는 분명 전 세계적 비극이었지만, 나는 그로 인해 방구석에서 집중하여 글을 쓸 시간을 벌었고 그해 여름, 투고를 할 수 있는 원고 초안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다.
하지만 불행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더위가 한풀 꺾인 8월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현실 앞에 그동안 내가 그리고, 쓴 모든 것들이 하찮고 의미 없어 보였다. 나는 투고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원고를 개인 노트북에 쳐 밖아둔 채 그렇게 '삶과 죽음' '영원한 이별'에 대해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6. 투고를 하다
두 달 즈음 지난 10월 말, 슬퍼할 때 슬퍼하더라도 이미 다 쓴 원고니 투고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투고를 하던가? 정작 원고를 쓰면서도 어떻게 투고를 하는지 도통 알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막연하게 나의 상상 속 투고의 이미지는 원고가 깔끔하게 출력된 종이뭉치를 각 출판사 우편으로 보내는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투고하는 사람은 요즘 없지만 말이다. 구글에서 어렵지 않게 알게 된 투고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각 출판사마다 투고를 받는 이메일 주소가 있어 그 주소로 적정한 양식(출간 기획서+원고)을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출판사 인터넷 사이트에 투고 전용 게시판 또는 업로드 서버가 있어 그곳에 원고를 등록하는 것이었다. 두 방식 중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이메일 투고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느 출판사에 어떤 이메일을 보내느냐였다. 이 문제 또한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는데, 이미 나보다 먼저 출간한 선배 작가(?)들이 공개한 자신만의 노하우에 따르면, 원고에 맞는 장르 전문 출판사를 찾아, 그 출판사 사이트에 들어가서 투고 이메일 주소를 일일이 찾아내면 되었다. 간혹 국내 출판사별 투고 이메일 주소가 일목 요연하게 정리된 리스트를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도 있었지만, 간혹 잘못된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어 웬만하면 일일이 발품을 팔아 직접 확인함이 나을 것 같았다. 나만의 소중한 원고를 출간해주는 중요한 동반자를 찾는 것이 그렇게 손쉽게 이루어져서야 말이 되겠는가.
한데 나는 무슨 오만이었는지, 투고만 하면 각종 출판사에서 서로 책을 내주겠다고 나설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엔 이름만 들어도 아는 소수의 유명 출판사들을 추려 이메일 주소를 확인하고 메일을 보냈다. 물론 선배 작가들의 SNS를 통해 각 출판사들의 일반적인 대응방식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일단 웬만하면 답장이 오지 않으며, 행여 오더라도 이메일을 개봉하면 "3~4주의 검토기간이 필요하다"는 식의 답장이란 것이었다. 대부분 여기까지이며, 간혹 정말 3~4주 후에 답장이 오는데,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면 이미 출간은 물 건너갔다는 식이었다. 어쨌거나 처음 메일을 보내고 며칠간 아무 답장이 없자, 그 근거 없던 자신감은 크기를 가늠할 수없을 정도로 작게 쪼그라들었다.
7. 모든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다
곧이곧대로 답장이나 전화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자, 나는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출판사들의 목록을 정리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11월 초까지 총 3차의 투고가 있었다. 반응은 크게 네 종류였다. 첫째, 무반응. 둘째, 단순한 거절 메일. 차라리 무반응보다는 좋았다. 셋째, 왜 거절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방식. 이 방식은 메일 또는 전화로 이루어졌는데, H출판사는 그 거절의 이유를 너무도 실랄(?)하게 알려주어, 깊은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다. 전화로 직접 거절 이유를 알려준 곳은 나의 원고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따뜻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분들에게 진실된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다.) 넷째, 일단 나의 원고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만나서 추가적인 이야기를 해보자거나(M사), 아니면 출판사 내부적으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겠다는(D사) 방식. 물론 두 출판사 모두 출간 확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두 출판사뿐, 그리하여 11월 중순, 약속을 하고 M사 방문을 했다. 홍대 인근에 있던 그 출판사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을 하며 다짐했다. "거절을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이런 소심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도 내가 쓴 원고의 내용, 구성이 뭔가 부족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기나긴 출퇴근길이 지루하여 W 오디오 북으로 도통 읽지 않던 대중 교양도서를 읽고(듣고) 있었는데, 똑같은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무척이나 친절하게 내용을 전달하고 있음에, 그리고 각각의 꼭지가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을 뿐 아니라, 일관적 주제를 향해 체계적으로 내용이 전개됨에 놀라고 있었다. 그런 책들에 비해 나의 원고는 너무나 불친절하고, 두서없이 느껴졌다. 글을 쓴 작가조차도 원고의 단점을 알아버렸는데, 그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 수익을 내야 하는 출판사가 내 원고를 더 좋게 봐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의 원고는 두 출판사의 최종 관문을 넘지 못했다. "잔뜩 실망한 채" 출판사에서 나오며, 나는 아내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 안 좋은 일을 겪었을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내가 더 미안해지는 상황을 잘 알아서 일까? 전화를 걸면서도 오히려 미안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로 접어드는 올림픽 대로에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있었다. 이 많은 차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길로 몰려든 것일까? 다들 정말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 정작 그 수많은 차들 중 하나였음에도, 마치 나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