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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Jan 14. 2023

슬램덩크

슬램덩크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개봉하였다. 1996년 연재 종료 후 몇 차례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되긴 했지만, 원작의 아우라에 미치지 못하는 퀄리티로 진심으로 슬램덩크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요즘 말로 찐팬) 큰 어필을 하지 못했다. 나의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그러한 애니메이션에 ‘참다못한’ 원작자 이노우에가 두 팔 걷어붙이고 성에 차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리라 다짐하며 극본과 감독직을 자임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이유야 어쨌든 작년 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제작이 완료되었고 일본에선 작년 말, 한국에서는 올초 극장 개봉을 하였다. 


슬램덩크 조금 과장을 섞어서 말하면 나의 인생을 바꾼 만화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놈의 만화에, 정확히는 그 만화의 그림체에 빠져서, 나의 연습장 곳곳엔 농구하는 사람의 그림이나 강백호, 서태웅 등의 얼굴 등으로 잔뜩 채워졌다. 특정 노트엔 글자와 숫자보다 그림이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렇게 입시 스트레스를 낙서와 그림으로 풀다 보니, 혹시 나의 앞길은 그림이 아닐까 하는 고민까지 하게 되었고, 대학 전공을 고민할 때 (이과생으로써) 그림, 미술과 가장 가까운 ‘건축과’가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재수까지 하고 나서야 목표한 대학의 건축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슬램덩크 때문에 건축과를 가게 되었다는 논리의 비약을 시도하려는 건 아니다. 그놈의 만화가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나의 연습장엔 다른 어떤 그림들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니까. 


지난 주말, 심야 영화로 예매를 했다. 지하주차장에서 4층 영화관으로 올라가는데, 승강기 안 7명 모두 내 또래의 아재들이었다. 발권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극장홀엔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젊은이들부터 나처럼 동행인 없이 혼자 서성이는 아저씨들까지 늦은 시간임에도 관객이 제법 많았다. 이놈의 슬램덩크가 뭐라고 이 수많은 남정네들이 황금 같은 토요일 밤에 집에서 술이나 홀짝이지 않고 부지런히 옷을 챙겨 입고 극장에까지 와 있던가?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깎아 올린 송태섭의 머리가, 만화 연재 당시 세련된 헤어스타일로 통하던 그 머리가 2000년대 초 ‘바가지 컷’으로 놀림받던 시절을 지나, 몇 해 전부터 다시 젊은이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슬램덩크의 인기는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끝나고 말없이 출구를 빠져나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역시나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말을 걸 사람도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슬램덩크 만화책 마지막 너서 권, 산왕전을 속독하며 명작의 감동을 곱씹어 음미하였다. … 반 친구가 어렵게 구해온 슬램덩크 만화책을 돌려보던 사춘기 소년은 어느새 사십 대 중반, 만화 속 고등학교 농구부 코치나, 학부모와 같은 나이가 되었는데, 채치수는 아직도 졸업을 못했고, 서태웅은 아직도 꽃미남이며, 강백호의 머리는 여전히 짧기만 하다. 나 역시도 여전히 감탄사를 연발하며, 마치 처음 보는 만화인 냥, 만화 속 그림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있다. 그렇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대학 졸업 이후 처음으로 오래간만에 슬램덩크 등장인물인 서태웅, 본명 루카와 카에데, 한자로 流川楓(류천풍) (간단히 말해서 '풍'이)을 그려봤다. 물론 만화를 보고 그리긴 했지만, 당시에 어찌나 많이 그렸던지 눈매나 코, 음영 선 등을 그리는데 손이 절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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