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면 위에 그린 그림
며칠 후, 또 다른 회사 동료분께서 나의 책을 잔뜩 구매하였으니 사인을 해야 한다며 나를 카페로 불렀다.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린 이야기를 하던 와중, 역시나 도면 위에 그린 그림이 언급되었다. 그분은 나의 도시 스케치들도 좋지만 무엇보다 도면 위에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이 그림, 아니 '낙서'는 2016년, 호찌민시에 위치한 현장 사무실에서 늦은 밤까지 당직을 서던 와중에 그린 그림이다. 그 당시 회사 직원들은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다가, 행여 폭우나 안전사고 등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전 직원들에게 위험 상황을 공유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날은 아무 일 없이 평화롭고 조용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한가하게 낙서나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날 역시 아무런 일이 없이 평화롭기만 했을 것이다. 다만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짙은 어둠으로 뒤덮인 창 밖, 에어컨 소음만이 가득한 사무실, 책상 주변 널브러진 도면들... 무엇보다 '쉬고 싶다, 숙소에 가고 싶다, 아니 한국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했던 나 자신이다.
이 낙서는 그러한 답답한 마음 때문에 나도 모르게 절로 그려진 그림이다. 처음엔 실제 도면에 사람 형상을 그려 넣는 것으로 시작했다. 건물의 옥상 부분이 워낙 작게 출력이 되어 세밀한 표현이 어렵게 되자, 아예 마음을 먹고 옥상 난간부(파라펫) 확대 도면을 찾아내어, 그 부분을 A3 용지에 크게 출력하여 다시 그림을 그렸다. 사무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감옥에 갇힌 것 같은 현실을 옥상 난간으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멍히 바라보는 것으로 표현했다. 실제로 호찌민 파견기간 동안 내내 나는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업무 중에 잠시 사무실에서 나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멍히 올려다보곤 했으니, 이 그림은 작가의 감정이 간절하게 녹아든 그림이었음엔 분명하다.
나의 이 낙서가 좋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이 환기시키는 감정과 그로 인한 공감대 때문일 것이다. 나의 가엾은 동료들은 나처럼 원하건, 원하지 않건 오랜 해외 파견 기간을 겪어야 했고, 먼 타국의 답답한 사무실에 향수병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노래도 그렇고, 소설도, 영화도 다 그렇다. 결국 사람들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경험, 자신의 내면을 읽는다.
여담이지만 도면 속 빗방물처럼 보이는 형상이 연속적으로 띠를 이루고 있는 표기는 단열재를 의미한다. 지붕의 단열재와 외벽에 단열재의 두께가 다른 것은 외기로부터 손실되는 열에너지, 쉽게 말해 태양의 열에너지가 지붕 쪽에 많이 쏠리며, 건물 안의 따뜻한 공기가 대부분 지붕 쪽으로 몰리기 때문이라 이해하면 된다. 한데 이상한 점 한 가지, 단열재가 파라펫 부분에서 이어지지 않고 끊기는 부분이 보일 것이다. 그렇다. 그쪽이 문제다. 베트남처럼 더운 나라에서는 저 부분이 크게 문제가 안되는데, 한국같이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 특히 겨울이 심하게 추운 나라에선 저렇게 단열재가 끊기는 부분에 실내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액체로 응결되는, 결로가 발생한다. 이를 냉기가 다리를 타고 넘어온다 하여 열교(cold bridge) 현상이라고도 한다. 큰 빌딩은 집에서 발생하는 곰팡이 정도가 아니라 비가 새는 것처럼 줄줄 물이 흐르는 정도니 세심하게 설계해야 할 부분이다. 국내에서는 일정 조건, 규모 이상의 건축물은 '에너지 절약 설계기준'에 따라 위와 같은 단열재가 끊기는 부분이 없도록 설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