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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퍼 Jan 01. 2022

부다페스트 05

마차시 성당의 파란만장한 역사

지난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나와 회사 동료(이자 후배)들은 처음으로 대면한 마차시 성당의 위용과 고딕 양식의 기품, 현란한 장식에 감탄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물론 나는 "역시 건축은 조명이야~" 같은 썰렁한 농담을 해주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꽤나 인상적인 성당 건축에 깊은 감동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가끔 (아니, 사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대화는 마음속의 본심보다는 그 상황에 따라 단어 선별, 억양 심지어 구조까지 달라지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느 식당에서 특별히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게 식사를 했는데, 오래된 친구들끼리 갔다면 "야, 여기 무(無) 맛이다~"라는 식으로 과장을 하며 친구들과 웃음거리를 공유했을 것이고, 행여 종업원이 식사 어떠셨냐고 묻는다면 "아, 정말 맛있네요~"라고 쌍 따봉을 치켜세웠을 것이다. 어불성설일 수도 있지만, 이건 거짓말을 했다기보다는 그 상황에 맞게 타자들과 언어 게임(?)을 한 기분이다. 일종의 테니스처럼, 공을 치고, 받고... 치고받는 방식의 문제. 그래서 가끔은 말을 하기 위해 불필요한 말을 하게 됨은 아닌지, 반성을 하게 된다.  

동료들과는 금세 성당을 지나쳐 어부의 요새를 둘러보며, 다뉴브강과 그 너머 국회의사당 건물에 입이 딱 벌어져 구경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멋진 광경을 보면 그것이 왜 멋있는지,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는지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본다. 나와 동료들은 말없이 사진만 십 수장을 찍었던 것 같다. 우리 셋은 국회의사당 방향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한 한 카페에 들어가, 맥주 세 잔을 시키고 오랫동안 수다를 떨다 숙소로 돌아갔다. 첫째 주 금요일에 있었던 일은 이렇게 마무리를 하자. ('어부의 요새'는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첫 번째로 맞은 일요일이자, 헝가리에서 처음으로 쉬는 날, 마지막 걷기 코스로 마차시 성당엘 들렸다.

서두가 길었다. 마차시 성당 이야기를 마저 하련다. 이번에 성당의 역사를 검색하며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마차시 성당의 역사가 헝가리 역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굴곡진 헝가리 역사의 상흔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성당이 겪은 파란만장한 역사는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앞의 글에서 짧지 않게 서양 건축양식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 마차시 성당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배경지식이기 때문이다. 일단 대낮에 마차시 성당을 본 회사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은 이러했다. "아니 11세기에 지어졌다는데 왜 이렇게 새 건물이야". 사실 정확하게 본 것이다. 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성당은 1970년대 완공된 건물이다. 그러면 11세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또, 고딕은 12세기 중후반부터 등장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앞의 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처음 이 자리엔 성 이슈트반 1세가 1015년 완공한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은 헝가리 최초의 왕이자(이건 논란이 있다고는 했다),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바로 그 왕이다. 물론 그때는 고딕 양식이란 것 자체가 없었으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참고로 로마네스크는 "로마풍의" 정도의 뜻으로, 조금 속되게 말하면 얼추 로마 시절의 건물 느낌이 나도록 지은 건축물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위키백과에 따르면, 성 이슈트반이 성당을 지었다는 사실은 1690년 쓰인 성당 비문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인터넷에선 자꾸 '이런 사실이 있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식의 문구가 넘쳐나서, 객관적 접근을 힘들게 한다. 이거 대학원에라도 가야 합니까?)

13세기 중반, 헝가리 왕국은 몽골제국의 1차 침공을 겪게 된다. 그렇다. (국사 시간에 꿈결에 들었던) 고려 시대 우리 한반도에도 몽골이 침입했던 그즈음이다. 몽골은 정말 동서 양방향으로 말 타고 다을 수 있는 곳은 다 쑤시고 다녔던 것이다. 어쨌거나 헝가리 왕국은 '모히 전투'라는 대전에서 헝가리는 몽골군에게 크게 패하고, 몽골군은 헝가리 내 약탈과 파괴를 강행하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성당은 그 시기(1241년)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헝가리의 왕 벨라 4세가 1255년부터 1269년까지 약 14년간 두 번에 걸쳐 파괴된 성당을 초기 고딕 양식의 번듯한 교회로 개축 및 증축하게 된다. 혹시나 해서 첨언을 하자면, 신축은 건축물을 새로 만드는 것, 개축은 기존과 동일한 규모로 다시 건축하는 것, 증축은 기존보다 확장하여 건축하는 것, 재축은 재난 등으로 인하여 기존과 똑같이 다시 건축하는 것을 말한다. 이후 14세기 후반, 조금 더 성숙되고 발전된 고딕 양식으로 성당을 리모델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100여 년의 시간이 흘러 15세기 후반, 헝가리의 '세종대왕'으로 알려진 마차시왕(Hunyadi Mátyás)이 집권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유럽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먼저 받아들이고 나라의 경제와 문화의 부흥기를 가져온 왕으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는 14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엄숙한 종교적 강압에서 벗어나 (그리스, 로마 시대와 같은) 자유로운 인본주의 사상을 지향한 시기였다. 하지만 마차시 왕의 르네상스 사랑이 건축에까지 발현되지는 않았나 보다. 그가 중축한 성당의 첨탑이 그 무엇보다 고딕스럽게 건축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1470년 마차시왕이 유독 높고 화려하게 증축한 남측부 종탑 덕분에  본래의 명칭은 '성모 마리아 성당(The Church of Mary)'임에도 불구하고 이 고딕 양식 성당은 '마차시 성당'으로 더욱 많이 불려지게 되었다.

자,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다시금 시련기가 찾아왔다. 성당에게도 시련기이지만, 헝가리 왕국 자체에도 시련의 시기였다. 바로 16세기 초중반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정복이다. 여기서 잠깐 오스만 제국에 대해 언급을 하자면, 오스만 제국은 오늘날 터키의 전신 제국으로 13세기 말 건국되어 15세기 중반 비잔틴제국을 정복하고 16세기부터 공격적인 영토 확장으로 유럽과 중동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았던 제국이다. 흥미롭게도 1차 세계대전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는 동맹국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여 한편으로 패전하는 수고를 겪기도 한다. 정말로 역사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어쨌거나 그런 오스만 제국이 무지막지하게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 헝가리 왕국도 예외 없이 침공을 당했다. 예상했겠지만 전쟁 중 마차시 성당의 지붕과 각종 시설이 파괴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정복이 시작된 이후에는 성당 내부의 화려한 기독교 장식은 회벽칠로 덮혀지고, 모스크(이슬람 성원)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모스크로 활용될 수 있음에 건축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 지배 중 대부분의 기독교 성당은 파괴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어느 나라에나 그 역사에는 큰 전환점이 있다. 근대 이전 헝가리 역사에는 앞서 언급한 오스만 제국의 정복 그리고 연이어 이어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복이 큰 전화점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교체는 동시에 일어났다. 바로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에 의해서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미처 독립도 이루어내지 못한 1686년,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땅에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물러나며 마차시 성당은 여러 기독교 종파(프란시스코회, 예수회)의 손을 거치며  모스크에서 교회로 되돌아왔는데, 복원되는 과정 중 기존 건축물의 개축뿐 아니라 기숙사 용도의 건축물도 덧붙여 증축되었다. 물론 증개축으로 새로 지어진 부분은 당시 17세기 초에 등장하여 한 세기를 풍미한 건축양식,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지며 실질적으로 마차시 성당 본연의 모습이 (모스크로 쓰인 이상으로) 가장 많이 훼손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헝가리의 역사는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한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 협약에 의해 외교권과 국방권이 단일화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867년 수립된 것이다. 배경은 이렇다. 18세기 말부터 프랑스에서 시작된 민족주의와 1848년 헝가리 혁명 그리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패배를 겪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짐에 따라 왕권과 외교권, 국방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공동으로 유지하되 자주권 등은 별개로 유지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이중 제국 시스템을 제안하여 헝가리와 대타협을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1867년, 합스부르크 왕가이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조제프 1세는 이곳 마차시 성당에서 헝가리 왕 대관식을 거행하게 된다. 프란츠 조제프 1세 집권 중 이 성당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각종 증축과 바로크 양식으로 원형과 너무 동떨어져버린 마차시 성당의 복원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헝가리 건축가 프리제쉬 슐렉으로 그는 충분한 고증과 그만의 건축 언어로 원래 이 성당이 갖추고 있었던 본연의 모습, 고딕 양식으로 복원했다. 그렇게 성당은 1893년 완공되었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아는 사실이겠지만, 1차 세계대전(1914~1918),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 중 하나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 이후 붕괴되고, 2차 세계대전(1939~1945), 역시 헝가리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 중 하나로 줄을 제대로 잘못 섬으로써 자국 영토를 주요 격전지로 내주게 된다. 그 결과 수도를 비롯한 곳곳이 폐허가 되고 마차시 성당 역시 이 시기 크게 파괴되고 만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저 역사 깊은 성당이 그렇게 새 건물처럼 보이는 이유가 확실해졌다. 그것은 전쟁이 멈춘 이후 1950년대부터 170년대까지 약 20년간의 보수 공사를 마친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마차시왕 이후로 진정 헝가리에게 좋은 시절이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하지만 비참한 현실 속에도 꽃은 핀다. 역사는 지금까지 그래 왔다는 것이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건 아니니까.



여기서 슬쩍 첨언을 하면, 앞서 언급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게르만 언어를 공유하던 독일 민족이 독일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렇게 세를 불린 독일은 오스트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 사건(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와 시작한 전쟁을 1차 세계대전으로 확산시키는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걸으면 보이는 도시, 서울" 많은 관심 바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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