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옷에게 / 안일함과 방황에 대하여

2025 11 04 화

by 풀씨

시옷, 아침이야.

나는 일을 시작했어.

하지만 아직 잠옷 바람이지.

아침은 먹었어.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지.

크리스마스 상품에 넣을 작은 카드들의 디자인을 수정해서

프린트하는 중이야.

그리고 출력소에 메모지도 한 상자 주문했어.

곧 크리스마스야.

아니라고? ^^

그래, 아직 11월이니까.

하지만 나처럼 아이코 이번에도 늦었는걸! 하며

동동거리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뭐, 그렇고...

며칠 전에 지읒 작가님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어.

우리는 모두 열심히, 자기 재량껏 살아왔는데

이제와 보니 뭐랄까 손에 쥔 게 없다는 느낌? ^^

그런 거지.

우리는 그림 그리는 재주 외에 별다른 재주가 없었으니까.

그저 자기 삶을 살아냈는데 (나름 착하고 성실하게)

이제와 보니 삶에 밀린 느낌? ^^

웃기지?

지읒 작가님이 그랬어.

안일하게 살아온 것 같다고.

방황하면서.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그랬던 것만 같아.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높은 산은 쳐다보지 않았고

힘든 길은 돌아갔으니까.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약간 모자란 정도를 해내며 살아온 것 같아.

그래선 안 됐던 걸까?

아무튼, 이제 나는 오십 중반이 되는 거잖아.

곧 두 달 후면.

40대 후반도 좀 그랬지만.

그래도 4를 달고 있던 때는 체력이라도 있었던 것 같아. ^^

물론 그때도 펄펄 날아다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프지는 않았거든.

아프지 않은 몸이라니...

큰 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매일 아침 에구구 몸살이야 하며 일어나지 않는 게

특별한 아침이 된 후에야

그때들이 얼마나 건강했던 건지 알 것 같아.

그래, 요즘의 나는...

가을 전시회를 마쳤고, 북페어를 마쳤고...

여름엔 새 그림책을 출간했고

봄에는 10주년 된 그림책 개정판을 출간했지.

한 해 동안 몇 개의 북 페어와 몇 번의 전시를 하며

열심히 살았어. 물론 출판사 일도.

모두 감사한 일이야.

그러나 그 모든 게 너무 '조금'이라는 생각을 해.

욕심이 많아서 인가?

'나에게는 늘 작은 것만 주어지는 것 같아'라는 생각도 들어.

아마, 적게 일하고 큰 행운 따위를 바라나 봐.

아무튼 나도 나를 평생 안일하게 살게 해 주었어.

불안으로부터 도망쳤고

생의 숙제들로부터 도망쳤어.

모두 미뤄두었지.

깊이 생각해야 할 일들은

나중으로 미루고 미뤘어...

방황이 아니라 갈팡질팡 허둥지둥하며 살아왔어.

이런 마음을 말할 곳이 없었어.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한없이 주고받고 싶겠어.

답도 없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 자신들도 미뤄둔 이야기를.

선뜻, 문득, 두서없이 꺼내 나누고 싶지는 않았을 거야.

나도 누군가 이 마음을 들고 내게 온다면

함께 한숨을 쉬며

서로가 더 못났다는 베틀 정도나 하겠지.


아무튼, 그 안일함, 방황에 대해

지읒 작가님이 짚어줘서 고마웠어.


그래, 그 안일함. 정말 다정한 위로가 되어주었어.

지금의 결과는 여기지만...

이게 끝은 아니겠지...?

나는 또 나의 안일함으로 숨어드는 걸까? ^^

오늘도 안일함과 방황을 친구 삼아

열심히 살아낼 거야.


시옷, 잊지 마. 나를.

나는 언제나 너의 시옷과 함께 할 거야.


그럼, 이만


2025 11 04 화요일

너의 시옷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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