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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 여행자 Dec 25. 2023

넉넉한 햇살 속으로

크리스마스 선물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이였다고 한다. 대여섯 살 무렵의 나는 매번 또래들이 뛰노는 골목길이 아닌, 한 지붕 아래 옆방에서 발견되었다. 저녁밥 먹을 때가 되면 엄마는 큰방 집 아주머니네 텔레비전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민폐를 끼치고 있는 어린 불청객을 거두어 왔단다.

  세 들어 살던 주인집의 텔레비전으로 한글을 깨친 이후부터 글자가 있는 곳은 어디든 혼자만의 놀이터가 되었다. 명절 친척댁이나 놀러 간 친구네에서도 그 집 책장에 매미처럼 붙어 있었고, 길바닥에 펼쳐진 신문지나 잡지 속에 얼굴을 박고 있기도 했다. 그때 읽었던 활자 속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내용의 흥미보다는 그냥 뭔가를 읽어내는 호기심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던 듯하다.

  집에는 책이 없었다. 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는 꼬박꼬박 챙겨주셨지만 이른바 독서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담긴 책들까지 갖출 형편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받고 싶은 선물리스트를 담아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동화책, 동화책~.” 영문도 모르는 어린 동생들까지 동원해 부모님의 귀에 나의 소원 딱지를 앉혔다. 내가 마음속에 품었던 동화책은 추석 때 동갑내기 사촌네에서 보았던 콩쥐팥쥐와 신데렐라, 미운오리새끼, 재크와 콩나무 등의 캐릭터가 예쁘게 그려진 컬러판 세계문학전집이었다. 집어던져도 끄떡없는 튼튼한 재질의 표지와 절대 구겨지지 않는 질 좋은 종이, 세련된 디자인으로 감싼 책은 자체로 고급스러움이 흘러넘쳤다. 어린 마음에도 아름다운 책을 향한 동경이 샘솟았고, 그처럼 멋진 세상을 가진 사촌이 막연하게 부러웠다. 내가 선물 받기를 바랐던 책은 내용과는 상관없이 명백하게 외양이 ‘예쁘고 아름다운 동화책’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아침, 바람과는 아주 먼, 지극히 교훈적인 위인전기시리즈 중 열 번째쯤을 차지하고 있던 한 권이 내 손에 쥐어졌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이라는 제목도 촌스럽거니와 조악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던 문고판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세계문학전집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밋밋하다 못해 초라한 책이 기쁨보다 큰 실망스러움이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선물 받은 책’이라는 애틋한 기억을 담고 유년의 내 머리맡에서 함께 자랐다.

  나만의 사연으로 엮인 김유신 장군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지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책꽂이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진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그 책의 표지그림과 똑같은 것을 보고 혼자 슬며시 반가웠던 추억에 다시금 새삼스러워하기도 했다.

  집에는 여전히 교과서 외에 읽을 책이 부족했지만, 점차 책은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주말 할머니 집에 가면 뒤란에 쌓인 삼촌과 고모의 교과서 더미에서 너대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과 ‘주홍글씨’, 알퐁스 도데의 ‘별’ 황순원의 ‘소나기’ 등의 소설 토막들을 찾아 읽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급도서에 비치된 양장판 세계위인전기전집과 도서실 서가에서 눈에 집히는 대로 마음껏 골라 읽을 수 있었다. 더는 부족한 책을 탓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사방에 널려 있었다. 독서보다 더 많은 볼거리가 널려 있는 지천 속에서 책에만 목매는 순정도 차츰 흐려졌다.

  그럼에도 도서관 서가는 숲 속 산책길만큼 설레는 곳이고 신착도서 코너에서 읽고 싶은 신간을 발견할 때면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평범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일상 속에서 떠나는 책갈피 속 세상 여행은 여전히 두근두근한 설렘이다. 호젓한 크리스마스 아침, 읽고 싶은 책을 쌓아놓고 연말을 보내는 넉넉한 햇살 같은 시간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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