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땔감을 구하러요

제주, 봄의 리허설 #1

by 일상 여행자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

마음에 담아온 멋진 풍경들을

호주머니에 넣은 성냥갑처럼

꺼냈다, 넣었다 하면서

심드렁한 일상을 설레며 지내보게.

여기가 채워주지 못할 때마다

거기서 꺼내온 것들로

지펴가며 살아가는 삶,

참 따뜻한 성냥개비가 될 것 같지 않아?


"내 딸이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꼭 그렇게 유별나게 살아야 하니?"

3월 말의 때 이른 벚꽃은 밤새 내린 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새벽안개처럼 조용히 떠나가기에 아침 공항으로 가는 교통편은 지리멸렬했다. 찬찬히 자초지종을 풀어놓기보다는 폭탄선언 마냥 던져 놓은 통보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시점이었다. 겨우 일주일인 데다 서재에 콕 박혀 나다닐 일 없을 거라 아무리 안심시켜도 소용없었다. 비상 연락망을 요구하는 엄마에게 전후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그 어려운 길을 결국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른 아침 배웅에 상응하는 진솔한 대가를 치르며 터미널로 향하는 아침 길은 밤새 쏟아붓던 비가 말끔히 씻겨놓은 풍경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이제 막 피어오른 벚꽃은 밤새 내린 비에 이미 젖어들어 쳐지고 있었다. 햇살에 환하게 반짝였으면 좋았을 벚꽃길이 회색빛 하늘에 퇴색된 채 뒤로 계속 밀려났다.

며칠간 제주도 작가의 서재에 머물게 된 걸 더없는 행운이라고 여기는 나와는 달리 멀쩡한 집 두고 제주도까지 가서 박혀 있겠다는 딸의 혼자 여행을 엄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행처럼 얘기했다. 애초에 한 달 지내기로 허락받은 일정을 부득이하게 일주일로 줄여야 했을 때는 제 복을 깎아 먹는 것처럼 억울하더니 이 고루한 상황을 헤치고 주어진 일주일도 그나마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충분한 시간처럼 여겨졌다.

회사는 일주일 전에 사직서를 들이밀어 이미 정리된 상태였다. 뜬금없이 다시 학교에 가겠다고 집안을 헤집었던 분위기도 개강 4주 차에 접어들어 엎질러진 일로 수습되고 있는 중이었다. 시급히 처리해야 하거나 이룩해야 할 과업을 안고 있는 처지도 아닐뿐더러 주어진 최소한의 책임마저 털고 완벽하게 홀가분한 상태, 말 그대로 텅 빈 그 자체였다. 더 이상 비워내고 덜어낼 것들이란 건 오래전에 홀가분하게 내던져 버렸으니 내 밑천은 모조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선 상에 선 지는 오래전이었는데 내내 망설이고만 있었다. 스타트할 동력이 필요했다. 소소한 책임감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던 것들, 끄적이고만 있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모아 수습해야 할 시간이 너무나 절실했다.

"관광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가서 집에만 머물 거라면서 굳이 제주도까지 간다니, 뭐 대단한 일을 하겠다는 건지."

마땅한 명분 없이 떠나는 여행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엄마의 트집은 계속 이어졌다.

"글 쓸 거예요. 꼭 쓰고 싶었던 글, 며칠 동안 콕 박혀서 완성해내고 올 거예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두서없는 허튼소리를 한다더니 때로는 억눌려 있던 진심이 얼떨결에 튀어나오기도 했다. 꽁꽁 숨겨둔 채 저 홀로 낡고 비루해져 버린 꿈. 세상에 내놓고 격려받기란 지탄받았던 공부보다 더 명분이 서지 않는 혼자만의 뜬구름이었고, 안에서 옹알대고만 있던, 아직 핏덩이에 불과한 영글지 않은 꿈이었다.

모든 떠남에 이유가 필요하다면 제주로 향하는 내 캐리어의 행방과 까닭을 설명해내기란 지금 내 재간으로는 불가능했다. 그저 혼자서 조용히 보내는 시간이 간절했다. 절박한 바람의 응답이었는지 우연찮게 좋은 기회를 때마침 얻게 되었고,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행운을 거머쥐어서 떠날 수 있었을 뿐인 여행이었다. 업무상 출장도 아니고 거창한 목적이 있을 리가 없는 내 여행의 이유는 어이없고 허탈하게도 그저 마음이 설레는 대로 떠나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반복되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기운이 나를 바꾸어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과 이곳에 있지 않은 뭔가가 거기에 가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는 대책 없는 동경이 집을 떠나기 전까지 나를 들쑤시고 약해지는 용기를 북돋아주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봄비 답지 않게 줄기차게 물소리를 내며 쏟아지던 비도 그치고 말끔하게 개인 동쪽 하늘에서 먹구름 조각을 걷어 젖히고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지로 떠나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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