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길에 대한 설렘이라지만 낯선 길은 긴장과 함께 두려움을 동반한다. 아무리 비행기 탑승이 대중화된 시대이긴 하지만 버스도 아닌 비행기를 놓치는 건 명백한 낭패다. 답지 않게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공항까지 도착하기 위한 경로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밤이었다. 여행의 설렘이 아닌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길 찾기에 헤매었다. 새벽 창가로 부딪히는 빗방울은 그치기는커녕 계곡 물소리를 내며 점점 거세게 흘러내렸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모로 가든 제주공항까지만 가면 되겠지"라는 자포자기식 결론에 도달했다. 무한 반복하던 시뮬레이션 상의 경로는 안중에서 지워버리고 그냥 아무에게나 맡겨 버렸다. 비만 좀 그쳐줬으면 좋겠다는 꿈만 꾸면서.
"여기 노선은 없어졌어요.
건너편 고속터미널에서 정각에 출발한 버스가 있어요."
7시 출발시간으로 알고 왔던 시외버스는 창구 앞에서 순식간에 고속버스로 둔갑했고 막 출발하기 5분 전이었다. 8시까지 죽 쳐야 하는 시간을 벌은 것만도 감사하다며 캐리어를 끌고 내쳐 달렸다. 아슬아슬하게 탄 일요일 아침 7시 고속버스의 승객은 오롯이 나 혼자 뿐이었다.
"용계 환승정류장까지 가세요?"
어젯밤 수없이 뒤졌던 나의 레이다망에 걸린 적 없는 새로운 경로였다.
"기사님, 대구공항까지 가려는데 동대구역이 가까울까요, 용계 환승정류장이 더 가까울까요?"
"다시 되돌아오는 동대구역보다는 용계 정류장이 가까울 수 있겠죠."
미처 입수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던져준 검표원이 두 번째 아무나 가 되어 주었다. 한 시간 동안 내게 허락된 전세 버스(?)의 차창 밖 풍경마저도 온전히 나를 위한 세상 같았다. 회색빛을 붉게 물들이며 밝아오는 동쪽 하늘과 간밤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새롭게 비추는 파란 하늘은 축복 그 자체였다.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택시는 휴일 아침 탁 트인 시내 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해 공항 입구에 캐리어와 나를 고이 내려다 주었다. 간밤의 일기예보와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나는 우산을 받치고 동시에 젖은 보도 위로 캐리어를 끌면서 두어 번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버스 승하차를 반복해야 했다. 주어진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으며 달리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던 터였다. 지레 지칠 뻔했던 예상 경로에 비하면 지극히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티켓팅을 마치고 수화물을 접수하고 탑승구 앞에서 대기하며 내려다본 공항 활주로와 하늘은 모두 말끔해져 있었다. 빗속을 뚫고 오르리라 예상했던 이륙에 비한다면 더없이 맑은 하늘 위를 날 수 있겠다는 설렘이 깜짝 선물처럼 얹혔다. 여행의 모든 순간을 좌지우지하는 변수인 날씨마저 오늘은 기꺼이 내편이 되어 주었다.
뒤늦게 발권한 좌석은 통로 쪽 자리였다. 나란한 셋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이 자리가 비어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창문이 절반 가려진 좌석이었다. 드문드문 하나씩 또는 연달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열에 비해 통로 쪽을 차지한 내 좌석 열은 온전히 비어 있었다. 반쯤 막힌 창이었지만 이 마저도 생각지 못한 횡재였다. 반쪽짜리 창문 틈으로 시원하게 뻗은 공항 활주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비행 전에 이미 가슴이 트여오는 듯하더니 순간 비행기 동체가 이륙하기도 전에 심장이 울컥하며 솟아올랐다. 낮과 밤을 가로지르는 날짜변경선을 넘는 것도, 대양과 산맥을 넘나드는 장거리 여행도 아니었으며, 단지 대구에서 제주까지 한 시간 남짓한 국내선 비행일 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한 동력을 모아 활주로 위를 달리고 그 끝에서 공중으로 훌쩍 날아오르는 이 순간 위에 그간의 내 안간힘이 죄다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이해받지 못하는 여행의 목적을 막무가내 침묵으로 밀고 오면서도 혹시라도 반대에 부딪혀 그나마 이 기회마저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내내 졸였던 마음과 끝내 억지가 되어버린 짧은 설득까지 모두가 여기에 다시 서기 위해서인 것처럼 느껴졌다.
대로가 골목길만큼 좁아지고 땅 위에 얹힌 모든 것들이 저 아래 바닥으로 까마득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폭풍우 이후의 청량하게 개인 하늘을 껴안고 도약한 비행기는 지상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 있다. 이 순간을 바꿀 지상의 시간들은 지금의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한순간을 위해 내 모든 여정들이 모아져 온 듯했고 마음 깊숙이 눌러왔던 뭔가가 풀리면서 자유로워졌다. 동시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그 하늘 위의 하늘로 올라왔고 구름 위에는 말간, 또 다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 한순간을 위해 나는 기꺼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