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여행자가 된다.... 어떻게 하면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 나를 둘러싸 풍경을 바꾸면 된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새롭고 또 신기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때 나도 바뀐다. 그러므로 여행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 김연수, '모든 게 끝났으니 진짜 여행은 지금부터'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는 벚꽃을 뒤로 남기고 바다 건너 아래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애당초 벚꽃은 물 건너로 보내고 접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주의 벚나무는 이미 꽃을 흩뿌리며 눈부신 이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꽃잎들이 땅바닥에 쏟아부어져 메말라가고 있었고 그나마 바람에 속절없이 쓸려 다녔다. 차라리 비에 젖어드는 마지막이 그나마 더 촉촉한 뒷모습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처연했다. 매몰찬 햇빛은 눈이 부시게 찬란했다.
해안가 도로를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들이 봄볕에 온통 반짝이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20년 만에 다시 만난 제주바다였다. 새삼스럽게 화들짝 놀라게 한 그 시간을 나는 무엇으로 채우고 보내왔는지. 공항의 야자수와 수평선 아득한 먼바다, 검은 돌담 안에서 더욱 선명한 노랑과 초록의 유채꽃물결이 바람에 너울댔다. 아스라한 기억만큼이나 모두 낯선 풍경이었다. 과연 난 그 빛나는 시간 동안 작은 반짝임 하나 있기나 했던 것일까.
연고 하나 없는 내게는 불모지 같은 이 낯선 땅에서 다행히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 목적지가 지금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끄는 유일한 빛이었다. 지도상으로는 버스가 달리고 있는 도로 밖으로 무수한 샛길들이 초록별로 찍혀 있었다. 눈길 닿는 대로 발길을 옮길 정처들이 넘치고 넘쳤다. 호기심 많은 인간에게 낯선 곳이란 얼마나 유혹적인가. 무시로도 샛길로 빠지는 스스로에게 작은 명분 하나를 기둥으로 박아 놓았더랬다. 이렇게라도 묶어 놓지 않으면 지그재그로 날뛰기 십상인 망아지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얼결에 쏟아냈던 호언장담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끄적임 하나는 이 길 끝에 내려놓으리라고.
바다를 끼고 햇빛 한가운데를 질주하던 버스에서 유채밭이 펼쳐진 길 한가운데에 떨어뜨려졌다. 눈앞에 웅장하게 솟은 검은 바위(성산일출봉)가 설마 이렇게 가깝게 있을 리가 없다며 지척으로다가온 목적지로 향했다. 샛노란 감귤, 이름 모를 꽃들과 신기한 잎사귀들, 여기저기에 눈 돌릴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뺏길 새가 없었다. 끝이 맞닿지 않는 내 어설픈 명분을 완성할 꼭짓점에 도착해야 했다.
담 밖에서 고개를 빼고 들여다본 마당과 아담한 초록색 지붕을 이고 있는 돌집이 이번 여행의 최종 종착지였다. 새하얀 대문으로 머리를 숙이며 들어설 때의 두근거림이란 과자집에 들어설 때 헨젤과 그레텔의 설렘에못지않았다. 이 야트막한 아지트가 일주일이라는 온전한 시간과 공간을 나를 위해 고스란히 내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짐들을 마루에 내팽개치고 마루와 방, 부엌 등 공간을들락거리며 환호하고 들떠 있는 모습은 낯선 집만큼이나 나 답지 않은 새삼스러운 모습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방안의 작은 소품과 책 하나하나를 안내하듯이 환히 비춰주고 있었다. 단정하게 손질된 마당 모퉁이에는 감나무와 귤나무, 꽃들과 잎들이 햇살 아래서 나른하게 반짝이며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 한가운데 서 있었다.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이며 천천히 걸터앉았다. 그제야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분명히 외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멀쩡한 집을 떠나 낯선 방을 찾아 제주까지 온 이유를. 내가 살아온 날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해서였다고. 내게는 이 막다른 방에서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던, 이해할 수 없는 깊숙한 질문들을 던져보고 의연한 어른답지 못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다고.
봄 끝자락의 벚꽃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잎사귀들 사이로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멋진 환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