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과 썰물처럼설렘으로 다가왔다가 흔적을 남기고 빠져나가는 인연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잘 감당하고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썰물을 잘 보내주는 일, 이 자연스러운 드나듦 속에서 나는 바닥에 딛지 못한 채 허우적 대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물살에서 흔들리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가는 먼 길을 택해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네 무모함은 어디서 나오니?"
석사도 아닌 다시 학부 새내기가 되겠다는 나를 두고 친구는 현실적인 조언들을 쏟아냈다. 절친이라는 자격으로 읊어지는 친구의 충고는 기막혀하는 가족들의 반대보다 더 거침이 없었다. 어느덧 늙어버린 나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대책 없이 청춘의 꿈을 꾸고 있는 '현실감 떨어지는 늙은 여자', 조곤조곤 쏟아내는 조언이 거기까지였으면 견딜 만했다. 한 치 더 깊숙이 파고드는 말들이 연달아 급소를 찔러댔다.
"욕심 내려놔, 더 이상 이용당하며 살지마. 그러니까 너를 만만히 보는 거야. 우리 부모님은 참 다행이다. 너처럼 철없는 딸을 두지 않으신 게."
수많은 말들이 스쳐가고 연달아 콕콕 박히는 말들이 난무하는 속에서 어디에서부터였는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 바닥이 꺼질 듯 묵직한 바위덩이가 심장에 내려앉더니 친구 전화를 끊고 나서 이틀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젠 어지간한 날 선 말들도 귓등으로 넘길 수 있는 연륜이 쌓였다고 자부했는데 아직도 세상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이 남아 있었다. 결국 나를 잘 알아주고 있다는 가족과 친구에게 보인 내 모습이란 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하고 비참했다. 그동안의 내 무한 긍정은 순진무구함이었고 꿈꾸었던 장밋빛 미래는 현실을 망각한 무모함으로 드러났다.
예상치 못한 반대와 뼈아픈 충고의 충격 속에서 휘청거리던 내가 택한 대처는 침묵이었다. 결국 나만의 방식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온전히 내 몫의 삶이었다. 그동안 안일하게 기대었던 사람들에게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라고 위안하며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감정으로 맞서기에 내 멘털은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내밀 수 있는 카드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이제야말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공수표조차 없다면 최소한 오기라도 부려야 하는, 막다른 보루에 도달한 듯했다.
친구의 선을 넘은 충고로 순식간에 닫혀버린 마음의 문이 쉽사리 열릴 것 같지도, 이제 더 이상 내가 남루해지는 것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구차하게 변명을 하거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돌아가는 우회의 여유마저도 급속도로 허약해진 내게는 사치스러운 허세였다. 무너지려는 감정을 추스르고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수습하기에도 버거웠다. 독기를 품어서라도 모질어지기로 작정했다. 걱정이라는 명목으로 상관하는 연락들을 두절하고 고립을 자처했다. 내 선택에 대해 철저히 혼자 감당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혼자만의 공간에 남겨졌다. 집을 떠나 낯선 방을 찾아 나선 길 끝에 무사히 안착했다. 이제야 쏟아내지 못하고 쌓인 응어리와 상처를 풀어헤치고 마음껏 울 수 있는 나만의 동굴에 지친 몸을 누일 수 있게 되었다.
백 년이 넘었다는 익숙지 않은 돌집의 문설주 무늬를 그리며 잠시 말똥 말똥거렸다. 불면으로 뒤척이기엔 떠나기 전날 이미 충분히 설친 밤을 보냈으며 그래도 바다를 건너는 비행을 했던 하루 끝이었다. 새로운 풍경들에 감탄하던 호기심도 낯선 길을 헤매듯 찾아오는 동안 지쳐 버렸다. 낯선 공간에 홀로 놓여 있다는 외로움을 덮고도 남을 고단함이 쏟아졌다. 곧바로 제주의 짙푸른 어둠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창밖으로 희뿌옇게 아침이 밝아왔다. 잠으로 회복할 수 없는 피로는 그리 많지 않은지 몸이 가뿐했다. 물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을 헤치고 산책을 서둘렀다. 포구로 걸어가면 40분 남짓한 거리에 성산일출봉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지척에 있는 성산일출봉에서 일출을 보지 않는다는 건 일출봉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힘들게 발디딘 이 섬에서의 무용한 시간 가운데 유일한 스케줄이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포구는 검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물새들이 너울너울 파도 위를 유영하고, 뒤꽁무니를 보이며 날아올랐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물 위로 내려앉았다 하는 오리들만 간간이 오고 갈 뿐이었다. 이른 아침 인적이 보이지 않는 바다는 쓸쓸했다. 흐린 안갯속에서 검은 바위와 바다, 아침 하늘은 잿빛으로 바래어 흑백 사진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온통 물기를 머금고 무겁게 가라앉은 아침, 일출을 보기엔 적당하지 않은 날씨였다. 낯선 길이지만 첫날 아침인 만큼 씩씩하게 출발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