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_<킹메이커 Kingmaker>(2022, 변성현)
01.
콘래드 홀(Conrad L. Hall, 1926~2003)이라는 촬영감독이 있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인 이미지들로 기억되는 분이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나 <아메리칸 뷰티>(1999), <로드 투 퍼디션>(2002) 등이 대표작이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케빈 스페이시 분)와 리키(웨스 벤틀리 분)가 건물 뒷공간에서 대화할 때 사선으로 떨어지는 극적인 조명 설계, 집 안에서 이동하던 캐롤린(아네트 베닝)이 멈춰선 지점에 정확히 떨어지는 그림자 등은 콘래드 홀 특유의 터치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빚어내는 창작물이다. 그만큼 시각적 표현, 스타일(Style) 요소의 활용은 텍스트를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극장 공간(혹은 거대한 스크린)의 아우라가 쇠퇴하고, 영화 매체에 대한 수요 양상이 급변하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스타일을 고민한 흔적이 드러나는 텍스트를 마주하는 것은 점점 귀한 일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때문에 그러한 작품을 만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매력적인 경험이 되고 있다.
02.
2022년 1월 26일 개봉한 <킹메이커>를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대한민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상적인 지점이 여럿 있었지만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색이다. <킹메이커>에 어떠한 성취가 있다면 분명 룩을 구현한 촬영과 조명에 상당한 공이 있을 것이다.
극 중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경선 1차 투표 이후 쉬는 시간을 보여주는 씬이 있는데, 이 씬의 연출이 대단히 압권이다.
해당 씬은 1970년, 실제로 있었던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 경선을 배경으로, 김운범(설경구/김대중을 모델로 함)을 모시는 서창대(이선균 분/엄창록을 모델로 함)의 계략으로 이한상(이해영 분/이철승을 모델로 함)이 무효표를 대거 던지는 바람에 재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시점을 다룬다.
이한상의 돌발 상황에 화가 난 강인산(박인환 분/유진산을 모델로 함)과 그의 세력이 이한상에게 으름장을 놓는데, 이들은 중앙이 뚫려 있는 돌림계단 구조의 건물에서 대화를 나눈다. 이 때 각기 다른 등장인물의 위치와 극적 상황에 따라 앵글과 색온도가 극명하게 나뉘는 연출이 등장한다. 이 계단의 꼭대기 층에는 서창대가 있는데 그 모습은 이한상의 시점을 빌어 극단적 로우앵글로 나타나고, 낮은 색온도의 조명이 사용되어 높은 색온도의 조명을 받고 있는 이한상의 공간과 상징적으로 대비 된다. 게다가 광원이 측면/후방에 위치하여 서창대의 모습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드러나며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판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악마적인 재능으로 김운범에게 유리한 판세를 조종하는 서창대를 적확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이다.
촬영이 진행되는 공간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는 콘티, 앵글/사이즈/피사체의 방향 설계, 과감한 조명과 컬러 전략등이 한데 어우러지면서도 무엇보다 서사와의 완벽한 결합을 이루어내는 씬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타일의 각종 요소를 통해 미장센과 인물 정서를 이처럼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연출은 근래의 국내, 심지어 해외의 경우를 포함해도 드문 편이라고 생각한다. <킹메이커>는 이처럼 그림을 만들어내는 행위에 대한 열정이 살아 숨쉬는 작품이다.
실제로 영상물 창작을 하는 경우에, 특히 상업적으로 배급되어 많은 관객을 만나야 하는 상황에, 이렇게 극단적인(?) 혹은 짙은 색채를 견지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이렇게 명암대비가 강해도 괜찮을까? 이렇게 비현실적인 색온도를 설정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을 하는 일이 다반사고, 결국에는 보편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킹메이커>의 완성도 높은 그림에서 나타나는 어떤 고집은 용기의 산물이다. 연출자의 뚝심이고 용감한 결단으로 진행된 결과물인 셈이다.
03.
사실 콘래드 홀 감독의 특성과 그 속에 담긴 영화적 재미는 과거 모 촬영감독님의 특강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이다. 영화가, 시네마가 가질 수 있는 고유성이 살아있는 텍스트는 수업용으로도 좋은 재료다. 공교롭게도 영상 창작과 관련된 수업 때, 영화 <불한당>(2016)의 몇몇 장면 - 특히 마지막 시퀀스가 종종 자료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한당>은 <킹메이커>를 만든 변성현 감독의 전작이자, 모두 조형래 촬영감독이 촬영을 담당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시네마틱'의 구현에 대한 역력한 고민의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른 요소들의 완성도나 재미를 떠나 그림을 보는, 장면 연출을 보는 재미 하나는 확실한 작품들이다.
04. [이 단락에는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킹메이커>에서 아쉬웠던 점 가운데 하나는, 서창대 캐릭터의 서사에 있다. 서창대 캐릭터는 뿌리가 부족한 편이다. 극의 주인공이지만 이야기를 전개 시켜나가는 작동 원리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서창대의 히스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초반 이야기의 유일한 작동 원리는 그가 북한 출신이라는데서 오는 한계에서 출발한다. 이 출신성분은 김운범을 돕는 일이나 본인이 정치적으로 뻗어나가고 성장하는데 있어서 결함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김운범의 세력이 커진 뒤 서창대가 변화하는 지점에서는 왜 인물이 그렇게 집착적으로 변하는가에 대한 인과율이 부족하다. 서창대가 출세나 입신양명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 목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고민-딜레마에 휩싸이는 장면 같은 것들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특히 후반부에 김운범과 독대하는 장면, 서창대가 국개론(국민들을 개에 비유하는)을 펼치며 극단적 시선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는데, 인물의 변화가 가장 급진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다. 변화의 씨앗이 충분히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클라이막스 장면이지만 몰입이 저하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많은 영화에서(특히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데올로기와 가족주의 관련한 트라우마는 대부분의 서사에서 캐릭터를 작동시키는 원리이고 가장 강력한 무기이지만(인간의 탄생은 대개 가족이나 국가와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만큼 농도 짙은 클리셰이기도 하다. 이러한 클리셰가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극과 함께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형성에 묶이게 되는 면도 있다고 본다.
조선 왕조 몇몇 왕들의 이야기나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룬 영화, 드라마가 주기적으로 제작되는 이유는 대개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에 서스펜스가 보장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은 모르지만 관객은 알고 있다는 설정에서 오는 긴장이 곧 재미인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처럼 언제나 의미있는 테마를 담기에도 좋다.
관객들은 알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 인물등이 그럴싸하게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게 될 텐데, 이처럼 시대적으로 발생한 여러 사건을 잘 구현하여 보여주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야기 진행의 핸들을 잡고 있는 캐릭터가 서창대처럼 옵저버의 느낌이 되어버리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수 있다. 차라리 유사한 서사를 픽션으로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테마는 다르지만, 한국 개봉 제목이 같아서 어쩐지 떠올리게 되는 <킹메이커> - 원제 <Ides of March>(2011, 조지 클루니) - 가 더러운 거래가 오가는 정치판 속에서 자신의 입신양명에 집착하는 캐릭터를 잘 설계하여 보여준 것을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희곡이 원작이기는 하나 아주 중요한 차이점은 <Ides of March>의 경우 코미디-블랙코미디의 틀을 가지고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서는 대한민국에서 시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유효할지에 대해서도 미지수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05.
<킹메이커>는 희열이 있는 텍스트다. 위에서 언급한 씬 말고도 서창대가 처음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이실장(조우진 분/이후락을 모델로 함)과 독대하는 씬도 꽤나 아름답다. 클로즈업 화면으로 이루어진 두 인물의 샷-리버스 샷인데 역시나 암부가 강조된 조명 설계에, 같은 공간에서 이럴 수 있나 싶을 만큼 대담한 색의 대비가 존재한다. 극초반에 대통령(김종수 분/박정희를 모델로 함)이 건배사 하는 장면에서 롱 쇼트로부터 클로즈업까지 한 호흡으로 줌-인 하는 시도는 또 어떠한가.
작품에서 구현한 스타일의 효과는 과연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체감했을 때 오롯이 전달될 성질의 것들이다. 더불어 큰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작품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의미를 생각한다. 살짝 멀리가면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과감함이 떠오르고,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2000년대 이후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이 계속 보여주고 있는 영화적 표현의 심오한 세계가 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은 자체로 희열이고 참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