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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Mar 11. 2023

<인간의 조건>, 한승태, 시대의 창

밑줄 간 도서관 책

장강명 작가님이 추천했다고 하여 책을 읽은 학형이 다시 내게 추천한 한승태 작가님의 르포르타주 <인간의 조건>은 과연 모든 학교에 권장도서나 필독도서로 갖다 놓아야 하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진짜 재미있었던 것은 책에 그어진 밑줄들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이 책에는 두 명 정도의 꾸준한 흔적으로 보이는 밑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어져 있었는데 한 사람은 검은색 볼펜을 사용했고 다른 한 사람은 연필을 사용했다.







볼펜 그은 사람은 약간 공부 잘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주제의식을 함축하는 문장, 작가가 힘을 준 것으로 보이는 문장 혹은 이 쯤이면 밑줄 칠 때 됐다 싶은 지점마다 어김없었다. 심지어 문단 전체에 대괄호 치고 별 표 해놓은 부분도 몇 군데 있었는데 이 쯤 되면 이 사람이 이 텍스트로 문학과목 시험이라도 본 게 아닌가 싶은 합리적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정말 별났던 것은 연필로 밑줄 그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진짜 하등 쓸데 없어 보이는 단어에만 밑줄이나 동그라미를 쳐놨다. 누가봐도 뻔한 주어 - 분명 화자인 내가 하고 있는 일인데 의무적으로 등장한 ‘내가’ ‘나는’ 따위의 대명사 라던가. 내가 숙식했던 방의 평방미터 따위, 하루에 잡은 꽃게가 몇 마리인지, 개같이 일해서 판 오이의 가격이 얼마인지. 온통 이런 숫자나 쓰잘데기 없는 지점만 골라서 책 읽는 내내 시선 빼앗는 연필자국을 새겨놓은 것이다. 이 정도면 노동하는 인간의 생태습성을 파악하기 위해 저 멀리 외계 따위에서 온 비인류의 소행이거나 노동하는 인간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어느 정도 일하면 얼마나 벌고 생산량이 어떻게 되며 얼마를 주면 되는지 면밀히 조사하려는(실제로 이런 부분을 조사하고 싶을 때 참고하기 좋을만큼 디테일하게 잘 쓰인 텍스트다) 혹은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는 이 따위 발칙한 책을 쓴 작자가 누구인지 들여다보려는 오너(의 칙령을 받은 머리나쁜 수행원)의 소행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되는 수준이라고 해야할 것만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공부를 못하거나 수학에 미친듯이 꽂혀 있거나.



도서관 책은 관리를 잘하는 것이 빌려주는 입장에서도 빌리는 입장에서도 의무지만 곧잘 접혀 있고 찢어졌거나 낙서되어 있다. 그것이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나는 밑줄 간 도서관 책을 보면 그 줄 그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아 흥미로울 때가 있다. 도서관에서 빌린 <인간의 조건>은 그런 의미에서도 재미있었다. 노동자 2~4명에게 주어진 방이 가로세로 3m, 5m 라는데 그 3m, 5m에 동그라미 친 독자에게 도대체 왜 그 부분에 연필을 갖다댔는지 미치도록 묻고 싶다.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누군가가 여기에 체크하며 ‘이 정도 방이면 일꾼에게 충분하군!’ 하면서 흡족해 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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